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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대근의 인정불가

미성년자이니 반대신문 말라고? 피고인 방어권 보장은 헌법적 가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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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근 한국형사ㆍ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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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 성범죄 피해자와 관련한 헌재 판결을 비판하는 김재련 변호사의 글에 대한 김대근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법무정책연구실장의 답글입니다.

2021년 12월 23일 헌법재판소는 ‘19세 미만 성폭력범죄 피해자’(이하 ‘미성년 피해자’)의 영상 기록 진술을 증거로 사용할 수 있게 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하 성폭력처벌법) 제30조 제6항에 대해 위헌 결정을 했다. 총 9인의 헌법재판관 중 6인이 위헌 판단을, 나머지 3인이 합헌 판단을 했다.

유남석 헌법재판소장. [뉴시스]

유남석 헌법재판소장. [뉴시스]

이 조항은 미성년 피해자가 법정에서 반복해 피해 경험을 진술하거나, 반대신문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2012년에 도입됐다. 취지는 옳지만 사실 이 조항은 전문법칙(傳聞法則)의 예외라는 근본적 문제가 있다. 전문법칙이란,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닌 타인의 진술이나 서류 등 간접적인 전문증거(hearsay evidence)는 재판에서 증거로 제시할 수 없다는 원칙이다. 누군가로부터 일방적으로 들은 내용 등을 증거라며 제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법원이 법정에서 직접 조사한 증거로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직접주의와 공판중심주의 원칙도 무력하게 만든다. 특히 이번 사안처럼 미성년 피해자에 대한 반대신문 없이 일률적으로 전문법칙의 예외를 적용하면 피고인은 반대신문의 기회를 전혀 부여받지 못한 채 미성년 피해자 진술을 근거로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있다. 증거 자체의 신용성을 보장할 수 없을 뿐더러, 반대신문을 통한 오류 시정의 기회를 놓칠 우려가 있다는 얘기다.

쟁점은 단순해 보이지만 가까스로 위헌 정족수(6인)를 충족한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를 둘러싼 다툼은 치열하다. 논의 전개를 위해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 쟁점에 대한 보다 명확한 이해다. 전문증거의 증거능력을 배척함으로써 직접심리주의와 공판중심주의를 철저히 하고 피고인의 반대 신문권을 보장하는 일은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헌법상 기본권 보장의 문제다.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의 정당한 반대 신문권 행사를 사익 추구로 폄하하는 순간, 사익과 공익 중 무엇을 우선할 것이냐는 잘못된 (이익형량의) 프레임에 갇히게 된다.

두 가치 사이의 저울질(이익형량)은 통약불가능한 가치의 비중을 평가한다는 점에서 내재적으로 한계가 있다. 심지어 우리는 종종 저울질 할 필연성이 없는 두개의 가치를 대립한다고 착각하는 허수아비의 오류(straw man fallacy)를 범하기도 한다. 일찍이 우리는 낙태죄 위헌을 둘러싼 논쟁에서 이러한 오류를 경험한 바 있다. 2012년 헌법재판소는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사익과 태아의 생명권 보호라는 공익’ 사이의 이익형량 문제로 접근하면서, 공익의 우선성을 논거로 낙태 처벌을 통한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 제한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2019년 헌법재판소는 태아의 생명권과 국가의 생명보호 의무를 강조하는 동시에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기본권이라고 인정했다. 형법상 낙태죄가 태아의 생명 보호라는 공익에만 절대적인 우위를 부여함으로써 법익 균형성 원칙을 위반했다는 점에서 과잉금지원칙을 위반한 위헌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함부로 사익으로 치환해서는 안 될 뿐더러, 미성년 피해자의 2차 피해 방지라는 공익과 단순하게 저울질(이익형량)을 해서도 안 된다. 피고인의 반대 신문권 제한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라는 기본권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헌법 제37조 제2항에 따른 과잉금지원칙 침해 여부를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더 나아가 피해자 보호라는 공익과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이라는 기본권 실현을 최대한 조화시킬 수 있는지 검토해야 한다.

둘째, 진실 발견의 수단이자 절차로서 대화의 중요성이다. 영상물에 수록된 미성년 피해자의 진술은 조사 과정에서 피의자(피고인 또는 그 변호인)의 참여 없이 수사기관 등의 질문에 대해 피해자의 기억에 의존한 답변을 녹화한 진술증거다. 불완전한 인간의 지각과 기억에 기초하기에 표현과 전달 과정에서 잘못이 있을 수 있다. 또 신문자의 신문방식에 따라 진술자의 원래 의사나 기억과 다른 내용이 전달될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반대신문이라는 대화를 통해 오류를 시정하고 진실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반드시 주어져야 한다. 대화는 관점 교환을 통해 진실을 찾거나, 적어도 변증을 통해 진실의 개연성을 높여주는 절차라서 그렇다.

이번 헌재 결정의 소수 의견에도 '피고인의 반대신문이 법관이 피해자의 진술 태도를 눈으로 보는 가운데 주신문 속에 숨어 있거나 은폐된 정황과 동기를 끌어낼 수 있고,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는 유력한 수단'이라는 대목이 들어 있다. 공판정에서 의견을 개진하고 증거를 제시하는 일련의 절차가 일방의 독백이 아니라, 상호 간의 대화라는 점을 확인한 셈이다. 대화에서 배제된, 즉 반대신문 기회가 보장되지 않아 진실 발견의 절차에서 배제된 피고인은 재판 결과에 수긍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은 피해자 본인에게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흉악 범죄를 저질렀을지라도 유죄 확정판결을 받기 전까지 피고인은 무죄 추정을 받는다. 피고인은 형사소송절차에서 단순한 처벌 대상이 아니라 절차를 형성‧유지하는 절차의 당사자이기에 검사에 대해 ‘무기대등의 원칙’이 확보되는 절차를 보장받을 헌법적 권리를 갖는다.

이번 결정으로 미성년 피해자 보호에 소홀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후속 대책이 반드시 필요하다. 헌재는 다수 의견으로 가급적 수사 초기에 피고인 측의 참여가 보장된 증거보전절차에서 진술증거를 확보함으로써 반복 진술의 위험을 최소화하고, 각종 증인보호제도를 적극 활용하며, 법원과 수사기관 등 담당기관의 역량 강화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물론 이것만으로 미성년 피해자에 대한 공백 없는 보호가 가능할지 의문이다.

법으로 들어가는 문은 여느 때와 같이 열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법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문지기는 문을 가로막고 이렇게 말한다. “그렇지만 지금은 안됩니다.”(카프카『법 앞에서』) 법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누가 문을 가로막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