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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보통 저렇게 취재합니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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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흠 있는 남의 장물에 손댄 MBC
몰래 녹음, 함정 취재가 당연시되는
그런 사회에 사는 우리는 행복한가

MBC의 윤석열 대선후보(국민의힘) 부인 김건희씨 녹음 파일 보도는 요란한 사전 예고에 비해선 딱히 놀랄 만한 내용이 없었다. 다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건 이런 저급한 유튜브 채널 사적 대화들이 어떻게 '공익적' 목적의 보도로 둔갑해 공영방송의 전파를 타게 됐는가다. 김씨 발언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다. 방송 후 많은 지인으로부터 "보통 저렇게 취재합니까?"란 질문을 받았다. 참으로 난감하고 허탈하다.

16일 오후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 부인 김건희씨의 '7시간 통화록'을 다룬 MBC 시사프로그램 '스트레이트'를 시청하고 있다. 뉴스1

16일 오후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 부인 김건희씨의 '7시간 통화록'을 다룬 MBC 시사프로그램 '스트레이트'를 시청하고 있다. 뉴스1


상대방을몰래 녹음하고도 반칙이 아니라 당연시하는유튜브 채널, 떡밥 던져 함정 취재한몰상식을 알고도 공익이란 이름으로 방송을 내보내는지상파 방송, 모든 게 법원의 가처분 신청까지 가야만 끝장이 나는이런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과연 정상일까. 행복할까. 주변을 좀 돌아보자.

#1 지난달 일본 한 방송사의 A기자가 스가 전 총리와 나눴던 '오프 더 레코드' 발언을 모아 책으로 냈다. A는 2015년 당시 관방장관으로 괌 외유 중이던 스가의 아침 산책길에 카메라를 들고 길을 가로막는다. 화가 난 스가에게 A는 사과 문자를 보낸다. 스가는 몇 분 뒤 "결례를 알았다니 다행이다. 내일 아침식사 같이하자"고 답신을 보냈고, 이후 두 사람은 급속히 가까워진다. 그로부터 3년 후인 2018년 A는 "당신 책을 내고 싶다"고 말한다. 스가는 "오케이. 단 관방장관을 그만둔 다음에!"라 답했다 한다. 이 책을 보면 스가가 "기시다가 (차기) 총리가 될 가능성이 큰데, 그러면 나라에 도움이 안 돼!" 등의 오프 발언이 생생하게 실려 있다. 흥미로운 건 일본 언론. 어떤 중앙 일간지·방송사도 A의 책을 소개조차 하지 않았다. "상호 신뢰를 토대로 했던 오프 발언을 상대방(스가) 동의 없이 책으로 폭로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란다.

한번 따져보자. A는 몰래 녹음도 안 했고, 제3자에게 유출도 안 했으며, 게다가 상대방이 말한 대로 관방장관을 그만둔 뒤 출판했다. 오프란 약속을 어겼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 대가를 치른다. 더한 경우도 있다. 2008년 유력지 아사히 신문은 한 사립대 병원의 보조금 불법 유용을 취재하던 자사 기자가 취재원 동의 없이 무단 녹음을 하고, 이 파일을 제3자에게 건넨 사실이 드러나자 즉각 '퇴사 처분'을 내렸다.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대화 당사자 간 비밀 녹음은 합법이다. 그런데도 해당 기자가 퇴사를 순순히 받아들인 이유는 뭘까. 일본이라고 공공의 이익이나 국민의 알 권리가 없는 게 아니다. 그걸 뛰어넘는 생명과 같은 가치가 바로 직업윤리란 공감대 때문이다.

#2 워싱턴포스트(WP)는 2016년 10월 미국 대선에 출마했던 트럼프가 NBC 연예프로그램 진행자와 버스 안에서 나눈 음담패설 녹음파일을 공개했다. 11년 전인 2005년 드라마에 카메오로 출연하기 위해 촬영장으로 가던 중 핀 마이크로 대화가 고스란히 녹음된 것이다. 유명 여배우를 유혹했던 경험담에다 온갖 저속한 언어가 등장했다. 이 기사를 보도한 파렌트홀드 기자는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대선 직전의 보도란 점에서 MBC 보도와 비슷하다. 그렇다면 차이는 뭘까. ^WP는 우연히 녹음된(의도적 몰래 녹음이 아닌) 파일을 보도했고 ^다른 언론사가 취재한 걸 건네받은 게 아니라 파렌트홀드 기자 스스로 취재해 파일을 입수했다. 직접 취재도 하지 않은 걸 달랑 공개한 MBC와 다르다.

2016년 대선 당시 워싱턴포스트가 입수해 보도한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선 후보의 음담패설 녹음파일

2016년 대선 당시 워싱턴포스트가 입수해 보도한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선 후보의 음담패설 녹음파일

행동이 모여 습관이 되고, 습관이 오래되면 성격이 된다고 했다. MBC는 그간 김대업의 의인(義人)화, 광우병 사기극, "딱 봐도 100만"(조국 지지 집회 인원) 발언, 경찰관 사칭 취재 등으로 수차례 물의를 일으켰다. 이제는 남이 건네준 '장물'에까지 손을 대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이재명 후보와 부인 김혜경씨의 녹음테이프를 틀지 않을 수 없게 궁색해졌다. 언론의 본분과 기자의 윤리를 망각한 MBC의 자업자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