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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김종영, 울긋불긋 ‘꽃대궐’서 미나리 생선탕 즐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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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1호 24면

예술가의 한끼 

사진가 임응식이 촬영한 1969년의 김종영. [사진 임응식사진아카이브]

사진가 임응식이 촬영한 1969년의 김종영. [사진 임응식사진아카이브]

창원은 큰 도시다. 경남도청의 소재지로 수많은 공단이 들어서 있다. 그러나 개발 이전의 창원 읍내는 한적한 시골이었다. 조각가 김종영(1915~1982)은 창원 읍내 소답동에서 태어났다. 읍내의 북쪽에는 향교가, 서쪽에는 창원보통학교가, 남쪽에는 시장이 있었다. 김종영의 집은 읍내의 동쪽에 있었다. 창원 일대의 넓은 들판을 거느린 김해 김씨의 대궐 같은 집이었다. 향교와 김종영의 집 사이에는 큰 미나리꽝이 있었다. 창원 읍내 사람들은 이 미나리꽝에서 나오는 제철 미나리를 즐겨 먹었다. 생으로 먹거나 쪄서 무침을 만들었다. 생선탕 위에 미나리를 얹히면 비린내가 날아간다. 이 고장 사람들은 겨울이면 거제도를 건너온 커다란 대구를 사다가 빨랫줄에 널어서 꾸덕꾸덕하게 말려가며 양식으로 삼았다. 대구탕 위에 얹혀 슬쩍 데쳐진 미나리는 겨울 속에서 봄의 기운을 불러내었다.

읍내 사람들은 김종영이 살던 큰 집을 꽃집이라 불렀다. 이원수(1912~1981)는 1926년에 동시 ‘고향의 봄’을 쓰며 어릴 때 가보았던 이 꽃집을 떠올렸다. 몇 년 후 이 시에 곡이 붙여져 국민동요가 되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시작한 노랫말은 ‘울긋불긋 꽃대궐’로 이어지는데 꽃대궐은 김종영 일가가 살던 창원 소답동의 꽃집을 말함이었다.

소년의 선대가 가진 땅은 넓었다. 명서동에서 봉암까지 이어졌다. 읍내 미나리꽝의 맑은 물은 남천을 따라 십 리를 흘러 팔용산 기슭의 봉암에서 바다를 만난다. 어린 소년은 여기서 태평양으로 펼쳐지는 바다를 보았다. 봄이면 봉암에 꼬시락(망둥어)이 몰려든다. 미끼를 달지 않아도 물어댈 정도로 성미가 급한 놈들이다. 꼬시락 낚시는 어른들에게는 횟감의 확보였고 소년들에게는 즐거운 놀이였다.

휘문고보 졸업 뒤 동경예대 유학

창원보통학교를 졸업한 김종영은 1930년에 상경하여 휘문고보에 입학했다. 휘문고보의 교장은 화가 장발(1901~2001)이었다. 김종영은 장발의 영향을 받아 1936년 동경예대로 진학했다. 휘문고보 출신으로 상지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박갑성과 함께 하숙했다. 인체의 사실적인 재현이 중심이던 동경예대의 분위기가 체질에 맞지 않았다. 서양 조각가들의 화집을 구해 따로 조각의 본질과 보편성에 대해 공부했다.

해방되자 장발의 주도로 출범한 서울대 예술대학 미술학부에 휘문고보 출신인 조각가 윤승욱과 함께 김종영, 박갑성이 교수로 합류한다. 동양화의 장우성과 더불어 김종영, 박갑성은 이 셋은 함께 퇴근 후 명동을 들락거렸다. 호주가인 장발은 그의 단골인 종로 1가 신신백화점(현재의 제일은행 본점 자리) 뒤의 바에 이 셋을 가끔 초대했다. 김종영은 특별히 술에 탐닉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경남 창원 소답동에 위치한 김종영 생가. [사진 임응식사진아카이브]

경남 창원 소답동에 위치한 김종영 생가. [사진 임응식사진아카이브]

서울대 미대는 서울대 법대와 함께 있었다. 1962년 연건동에 있던 서울대 수의대가 농대와 통합하여 수원으로 옮기자 미대는 수의대 자리로 옮겨졌다. 넉넉한 공간이 생겼다. 땅바닥의 1층은 조각과의 실기실 및 교수들의 작업실이 되었다. 김종영은 처음으로 자신의 작업실을 가지게 되었다. 작업실이 생기자 작업에 탄력이 붙었다. 1963년 서울대 관사를 떠나 삼선교 언덕에 마당이 있는 집을 구해 나갔다. 마당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조각작업을 할 수가 있었다.

통영고를 졸업한 심문섭이 서울대 미대에 입학한 건 1961년이다. 억센 통영 사투리가 소통을 막았다. 김종영은 그에게 표준어를 쓰라고 충고했다. 경상도 사람들은 서울말에 대한 저항은 있지만 표준어에는 저항이 없다. 소년 시절의 후반부와 청년 시절을 서울에서 보낸 김종영은 서울말이 아닌 표준어를 쓰고 있었다.

김종영의 조각은 ‘불각(不刻)의 미’로 요약된다. 불각은 파지 않는다는 뜻이다. 억지로 파 내려가지 않고 조각을 완성할 수만 있다면 이는 깊은 경지가 될 것이다. 김종영을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로 부른다. 필요한 상을 끄집어내는 추상(抽象)과 불필요한 상을 파서 버리는 사상(捨象)은 동일작용의 양면이다. 판다는 것은 구차한 현상을 사상하는 작업이자 본질을 퍼 올리는 추상의 작업이다. 그러니 불각은 아예 안 판다는 뜻이 아니라 나무든 돌이든 재료 속에 이미 담겨 있는 상의 본체를 통찰하여 단도직입으로 진실의 경계 안으로 들어가 본질적인 추상을 퍼 올린다는 뜻이 된다.

생전의 김종영은 뭔가를 도모하는 데에 소극적인 사람으로 보였다. 1975년에 한국의 단색화를 출범시킨 적이 있는 일본 동경화랑의 야마모토 사장은 한국 현대미술에 관심이 많았다. 예컨대 김종영의 동경예대 동기인 다테하타 가쿠조(建畠覚造 1919~2006, 다마대학 교수를 지냈음. 다마대학 학장을 지낸 그의 아들 다테하타 아키라는 미술평론가로 지금도 한국 현대 미술가들과 교류가 많음) 등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일본 조각가들보다는 김종영이 훨씬 더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김종영 ‘작품 79-8’, 1979 , 65x34x30㎝.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김종영 ‘작품 79-8’, 1979 , 65x34x30㎝.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1980년쯤 서울을 방문한 야마모토는 김종영을 만나고 싶어했다. 조각은 운반이 힘들기 때문에 국제전의 실행이 번거롭다. 그만큼 야마모토는 김종영이 절실했다. 동경화랑 전시는 당시 한국 미술가들의 꿈이었다. 김종영은 만남을 거부했다. 일본 미술계의 흐름이 보편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판단한 건지, 그의 평소의 태도대로 하는 것보다는 안 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이라고 판단한 건지는 아무도 모른다.

미술가들은 대체로 행동과 자기표현이 넘친다. 이와는 반대로 김종영은 말과 행동을 아꼈다. 대신 안 보이는 데서 사람들을 배려했다. 그런 점이 학생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서울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황창배는 결혼식 주례로 김종영을 모셨다. 서예가 철농의 딸인 신부 이재온이 왜 전공도 아닌 조소과 교수님을 모셨느냐고 물었다. 서울미대생들은 전공을 불문하고 다 김종영을 존경한다고 대답했다. 결혼식장의 신부는 떨고 서 있는데 주례는 더 떨고 서 있었다.

김종영은 남 앞에 나서는 걸 힘들어하는 내향적인 성격이었다. 학생들의 봄 MT에 가서도 노래를 잘하면 작품이 나빠진다는 구실을 대어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경남의 바닷가 출신들이 대체로 행동이 적극적인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화랑에다 작품을 내놓고 파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원화랑의 정기용과는 결이 잘 맞았다. 정기용은 화랑주인이 아니라 김종영을 존경하는 미술애호가로서 그의 작품을 사서 모았다. 봄이면 큰 민어를 구해다 민어탕으로 손님을 접대하는 정기용이다. 최고의 와인 소믈리에인에다 미술계 최고의 미식가인 정기용은 김종영을 귀하게 모셨다.

정기용, 존경심에 민어탕·와인 대접

삼선교 집은 나중에 옆의 땅을 매입하여 제자인 조국정의 설계로 작업장을 지었다. 김종영의 조각작품은 크지가 않다. 조수의 도움 없이 오롯이 혼자서 할 수 있는 크기의 작품들이다. 자신의 손길이 온전하게 다다를 수 있는 크기이기에 조각가의 몸과 대상인 조각이 따로 놀지 않았다. 조각을 하다 지치면 의자에 쉬면서 작업하던 조각을 바라다보았다. 틈틈이 손으로 쓸고 만졌다. 그래서일까 김종영의 조각에서는 금방 손을 뗀 듯 작가의 체온이 느껴진다.

제자 심문섭이 차를 삼선교로 몰고 와서 그의 작업실이 있는 덕소로 모셨다. 한강을 바라다보는 걸 좋아했다. 미나리 대신 쑥갓을 넣은 쏘가리탕이 맛있다고 했다.

김종영은 부친의 호 성재(誠齋)를 따서 자신의 호를 우성(又誠)으로 했다. 어릴 때 시서화에 능한 부친으로부터 서예를 배워 예술의 바탕을 닦았다. 휘문고보 2학년생 때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제3회 전조선학생작품전람회 서예 부문에서 중등부 장원을 할 정도였다. 김종영은 쉬지 않고 글씨를 쓰고 또 드로잉을 했다. 몇 년 전 학고재에서 추사 김정희와의 이인전이 열렸다. 글씨와 조각 모두 지극한 경지였다.

김종영의 종부성사는 서강대 교수였던 친구 김태관 신부가 맡았다. 의령 출신인 어머니 광주 이씨는 아들을 먼저 보내고 삼선교 집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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