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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임응식, 돈가스 안주에 청주 즐긴 명동 순례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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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6호 27면

예술가의 한끼

임응식의 대표작 ‘구직(求職)’, 서울 미도파 앞, 1953년. [사진 임응식 유족]

임응식의 대표작 ‘구직(求職)’, 서울 미도파 앞, 1953년. [사진 임응식 유족]

‘구직(求職)’ 사진으로 유명한 임응식(林應植·1912~2001)은 부산 대신동 출신이다. 일찍 개화한 부유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은 서양화가 임응구(林應九)다. 임응식은 부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26년 일본 와세다중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사업차 만주 등지를 여행하던 맏형 임응룡이 동생의 입학 선물로 카메라를 사다 주었다. 독일제 어린이용 카메라 ‘박스 텡고르(Box Tengor)’였다. 임응식은 이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바이올린 연주와 그림 그리기에 뛰어났던 그는 이때부터 그의 재능을 사진에만 집중했다.

이중섭은 큰 화가 못 될 거라 오판

6개월 과정의 부산체신리원(遞信吏員)양성소를 수료한 후 1932년부터 1934년까지 일본 도시마(豊島)체신학교를 다녔다. 1935년 강릉우체국에서 근무하면서 강릉사우회(寫友會)를 조직했다. 1938년부터 43년까지는 부산지방체신국에서 근무했다. 1944년부터 46년까지 일본물리탐광주식회사에서 과학사진을 찍었다. 탐광(探鑛)은 전자파, 음파, 전극 등을 이용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지층 내부의 금속, 공동, 지하수 상태를 추적하는 일이다. 탐광의 결과물 제출에는 측정값은 물론이고 반드시 위치좌표, 고도, 일시 등이 기재된다. 이때 생긴 습관인지 알 수는 없으나 임응식은 그 누구보다도 사진 한 장 한 장의 기록을 매우 엄격하게 남겼다. 큰 사진에는 연월일을, 작은 사진에는 연월을 어김없이 기록했다.

1946년 부산에서 사진광화회를 창립하고, 1947년 부산예술사진연구회를 조직해 회장이 됐다. 그리고 ‘ARS 사진뉴스’를 발행했다. 생활 방편으로 등사인쇄소와 사진현상소를 운영했다.

생활주의 리얼리즘을 추구했던 사진 작가 임응식, 서울 명동, 1993년. [사진 임영균]

생활주의 리얼리즘을 추구했던 사진 작가 임응식, 서울 명동, 1993년. [사진 임영균]

6·25 전쟁이 나자 임응식은 종군기자가 됐다. 1950년 9월 마운트 머킨리함에 승선해 인천상륙작전을 찍었다. 생생한 영상을 담은 그의 필름은 다른 종군기자의 필름과 함께 미군 측에 곧바로 보내어졌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따로 표기된 인천상륙작전의 사진들은 찾을 길이 없다. 인천에서 서울로 진격하면서 전쟁의 비참한 모습들이 그의 카메라 렌즈에 포착됐다.

이때 라이프지의 간판스타 사진가이자 2차대전의 종군기자였던 마가렛 버크 화이트(1904~1971)를 만났다. 임응식은 그녀의 대담함과 엄정한 직업정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전쟁은 임응식을 엄격한 리얼리즘 사진가로 단련시켰다.

임응식과 비슷한 나이 또래인 이웃 일본의 사진가 도몬 켄(土門拳·1909~1990)은 1950년대 전반에 사회적 리얼리즘을 표방했다. 이를 의식했는지 임응식은 자신의 작업을 ‘생활주의 리얼리즘’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국내 사진계의 주류이던 ‘살롱 픽쳐’와 과감하게 결별했다.

전쟁 때 수많은 예술인이 부산으로 피란 왔다. 임응식은 그들과 교제를 하면서 안목을 넓혔다. 그들은 나중에 임응식의 피사체가 돼 주었다. 한국의 숱한 문화예술인들이 그의 카메라 앞에 섰다. 문학계에서는 구상, 오상순, 손소희, 이병주, 안수길, 송지영, 윤석중, 최정희, 서정주, 박인환, 백철, 조연현, 조병화, 정비석, 김광섭, 김말봉, 김동리, 김소운이 임응식과 작업했다. 미술계에선 남관, 천경자, 변관식, 오지호, 손응성, 윤중식, 최영림, 장발, 장우성, 장욱진, 문신, 박고석, 권옥연, 박생광, 허백련, 도상봉, 정규, 김기창, 김환기, 김종영이 모델이 됐다. 음악의 안익태, 윤극영, 박태준, 임원식, 김자경, 김동진, 전봉초 그리고 무용의 조택원 등도 그랬다. 이중섭과는 몇 번 마주쳤는데도 사진을 찍지 않았다. 이중섭은 결코 대단한 화가는 안 될 거라고 잘못 판단했다. 이중섭의 사진을 남기지 못한 임응식은 두고두고 후회했다.

서양의 포토그라피는 빛의 그림이란 뜻이다. 이를 한자문화권에서는 굳이 사진으로 번역했다. 사진(寫眞)이란 상(象 또는 相)을 상(像)으로 옮기는 일 즉, 진상(眞相·참모습)을 담아서 다른 차원으로 옮긴다(寫)는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인물화를 사진이라 불렀다.

임응식의 작업은 포토그라피보다는 조선시대의 사진에 더 가깝다. 피사체인 인물의 진상은 물론 빛(포토)의 배후에 놓인 인물의 정신까지도 담으려 애를 썼다. 피란지 부산에서 알게 된 미술평론가 이경성(1919~2009)은 사진에도 관심이 컸던 만큼 임응식을 각별하게 대했다. 1982년 그가 관장으로 있던 덕수궁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임응식 개인전이 열렸다. 다른 작품들과 함께 인물사진들이 대거 전시됐다. 임응식을 존경하던 부산 출신의 미술평론가 석도륜이 전시명을 ‘풍모(風貌)’라 붙이고 표지의 제자를 붓글씨로 썼다. 임응식의 작품 420점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영구소장됐다.

임응식은 1953년 부산 피란 시절의 서울대 미술대학에 사진과 강사로 출강했다. 사진에 관심에 많았던 미술대학 학장 장발(1901~2001)이 그를 불렀다. 우리나라 최초로 대학의 정식 커리큘럼으로 개설된 사진학 강의였다. 이후 이화여대, 홍익대 등에서 사진학을 가르쳤다.

임응식은 환도 이후 서울로 와서 장충동에 정착했다. 사진학 강의를 개설한 대학이 늘어났다. 강의 시간을 맞추기 위해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를 구입하여 타고 다녔다. 중앙대 예술대학이 사진학과를 출범시킨 건 1972년이다. 예술대학장인 소설가 김동리는 사진학과를 상징할 만한 원로작가로 임응식을 찾았다. 1974년 임응식은 중앙대 사진과의 교수로 영입됐으며 1978년 정년을 맞았다. 중앙대 교수 시절에는 흑석동의 한옥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1980년대가 되자 구반포 2단지로 주거를 옮겼다. 18평형 소형아파트였다. 운신이 힘들 정도로 필름, 빈티지 프린트 등 그의 사진 자료들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퐁네프의 연인들’ 찻집 창가가 지정석

1998년 중앙대 사진학과갤러리에서 열린 임응식 개인전, (앞 왼쪽부터) 임응식, 심문섭, 임영균. [사진 임영균]

1998년 중앙대 사진학과갤러리에서 열린 임응식 개인전, (앞 왼쪽부터) 임응식, 심문섭, 임영균. [사진 임영균]

임응식은 거의 매일 명동을 찾았다. 35㎜ 필름 카메라로 명동의 일상을 기록했다. 중앙대 사진학과 학생들의 현장수업도 명동에서 했다. 아침 10시쯤 구반포의 집을 떠나 명동에 도착하면 꽃집부터 들른다. 꽃집 아가씨들은 풍모가 온화한 할아버지 임응식을 반겼다. 추운 겨울에는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이 차갑다고 만져서 데워 주었다. 명동 입구 명품수리골목 2층에는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의 큰 포스터가 걸린 찻집이 있었다. 길 건너 미도파백화점이 보이는 창가가 그의 지정석이었다. 무심하게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팔순 사진가의 침묵과 20대 아가씨들의 재잘거림이 잘 어울렸다.

임응식에게 명동의 호사는 1983년 서울에 처음 생긴 일본식 돈가스 가게인 ‘명동돈가스’ 순례다. ㄷ자로 된 테이블이 길게 이어져 있고 그 가운데에 놓인 튀김용 기름통에서 돈가스가 튀겨지고 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젊은 사내들이 능숙한 동작으로 고기를 건져 내어 먹기 좋게 칼로 자르는 모습, 코를 간질이는 고소한 기름 냄새, 모두가 유쾌하다. 잘게 썬 양배추에 소금을 살짝 뿌려 숨을 죽인 다음 야채소스를 뿌린다. 돈가스 한 점 한 점을 안주 삼아 따뜻한 청주로 입술을 적신다. ㄷ자형 테이블이라 혼자 앉아서 돈가스를 먹어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일찍부터 혼밥족, 혼술족이 된 명동의 모더니스트 식객들 틈에서 임응식은 느긋하게 도시 속의 휴식과 즐거움을 누렸다.

임응식은 애주가였다. 식전주는 필수였다. 해외출장을 나가서도 식전주로 위스키를 한 잔쯤은 해야 하는데 잔술 가격이 제법 비쌌다. 궁리 끝에 35㎜ 롤 필름을 담는 플라스틱 케이스에 위스키를 채워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사진가 임응식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철두철미다. 그는 사진의 촬영에도 사진의 기록에도 그리고 삶의 실천에도 모두 철두철미했다. 매사에 철두철미한 임응식도 한 점의 돈가스와 한 잔의 술에는 표정이 어린애처럼 풀어졌다. 명동의 플라뇌르(산책자) 임응식은 일용할 필름 속에 매일 하루치의 생활주의 리얼리즘을 채워 나갔다. 명동의 언덕과 골목을 걷고 또 걸으며 천수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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