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찬밥에 총각김치면 족해” 윤형근, 그림처럼 단순한 점심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776호 24면

예술가의 한끼

PKM 갤러리 ‘포용: 윤형근과 추사 김정희, 도널드 저드’ 전시회. [사진 PKM 갤러리]

PKM 갤러리 ‘포용: 윤형근과 추사 김정희, 도널드 저드’ 전시회. [사진 PKM 갤러리]

윤형근(1928~2007)의 그림은 심심하다. 색채는 울트라마린(ultramarine, 남색)과 엄버(umber, 다색) 딱 두 가지. 형태는 밋밋한 작대기 한두 개 세워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의 그림만큼이나 그의 성격도 단순하다. 그러나 그의 삶은 파란만장이었다. 그는 젊어서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다. 나머지 삶은 덤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인지 결과에 연연하거나 이해에 휘둘리지 않고 덤덤한 태도로 삶을 일관했다.

윤형근은 충북 청원군 미원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경기고보 출신의 지식인으로 사진, 서예, 동양화 등에 정통했던 해강 김규진에게 사사할 정도로 예술적 소양이 깊었다. 윤형근이 청주상업학교를 졸업하자 몇 달 후 해방이 되었다. 청주사범학교 단기 강습과를 마치고 교사생활을 하던 중 1947년, 서울대 예술대학 미술학부에 제1회로 입학했다. 수화 김환기(1913~1974)가 미술학부 교수였다. 이듬해 국대안(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에 나섰다가 1949년에 제적을 당했다.

한국전쟁이 났다. 보도연맹 사건 때 연행되었으나 탈출하여 학살을 면했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대에 복학하려 했으나 허용되지 않았다. 홍익대로 편입했다. 이번에는 김환기가 홍익대의 교수로 와 있었다. 국대안 반대운동을 했고 전쟁 중에 북한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6개월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로스트로포비치 등 클래식 음악 좋아해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윤형근. [사진 PKM 갤러리]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윤형근. [사진 PKM 갤러리]

그는 수화의 큰딸인 김영숙과 결혼했다. 수화와 윤형근은 스승과 제자에서 장인과 사위가 되었다. 수화를 아버지, 수화의 부인인 김향안을 어머니라고 불렀다. 윤형근의 가족은 1967년에 서교동의 국민주택으로 이사를 왔다. 1983년에는 국민주택을 헐고 2층 양옥을 지어 거기서 종생했다. 1층은 작업실, 2층은 살림집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윤형근의 작품들은 대부분 이 작업실에서 나왔다.

홍대 학생이었던 화가 김영헌(1964~ )은 1990년부터 1996년까지 1층의 작업실에서 윤형근의 조수로 일했다. 한 달에 일주일 정도 가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캔버스를 짰다. 캔버스 천은 고급 프랑스제 마지(麻地)였다. 롤 하나에 대형 캔버스는 몇 개 나오지 않았다. 하루에 100호 크기의 캔버스를 8개에서 10개 정도 짰다. 3일 정도 연속으로 작업하면 20개에서 30개 정도가 제작되었다. 며칠 후 가 보면 캔버스는 거의 다 이미 그림으로 완성되어 다른 방으로 옮겨져 있었다. 어쩌다 아직 덜 마른 그림이 바닥에 하나 누워있을 정도였다. 언제나 새 작업실처럼 깨끗하게 정리정돈이 되어있었다.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릴 땐 오래된 독일제 텔레풍켄 진공관 라디오를 틀어놓았다. 클래식 음악 방송만 들었다. 2층 살림집에는 영국제 쿼드 오디오 시스템이 있었다. 평판형 스피커는 그가 좋아하는 현악기 연주에 최적한 음질을 구현했다.

‘청다색(Burnt Umber & Ultramarine Blue)’, 1978, 면포에 유채, 229.5x181.5㎝, TATE 미술관 소장. [사진 PKM 갤러리]

‘청다색(Burnt Umber & Ultramarine Blue)’, 1978, 면포에 유채, 229.5x181.5㎝, TATE 미술관 소장. [사진 PKM 갤러리]

김영헌은 윤형근에게 파블로 카살스가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이야기했다. 윤형근은 동년배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1927~2007)의 연주를 좋아한다고 했다. 이미 카살스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윤형근이었지만 젊은이의 말을 처음 듣는 듯 경청했다. 표현이 직업인 화가들은 대개 듣기보다는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렇지만 윤형근은 귀 기울여 음악을 듣듯,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편이었다. 음, 음 하는 추임새를 넣어가며 상대방을 격려해주었다. 김영헌은 AR 스피커를 갖고 있다 말했다. 사실 그건 길에서 주운 것이었다. 윤형근은 그걸 대견하게 여겨 구색을 갖추라고 AR XA 턴테이블을 선물했다. 나중에는 암펙스 분리형 전축 세트 일체를 큰 보자기에 싸서 선물했다.

서교동 집의 정원은 길고 좁았다. 고무호스로 화초에 물을 뿌렸다. 야틈한 돌확의 물을 새로 갈아주는 아침마다 참새들이 몰려들어 날개를 파닥이며 목욕을 했다. 깃털을 흘리고 똥을 싸놓고는 가벼운 몸이 되어 어디론가 후다닥 날아가 버린다. 참새를 기다리며 매일 아침 새 물을 갈아주는 일을 윤형근은 즐겼다.

가끔 홍대 앞으로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국물이 정갈한 꼬리곰탕이었다. 고기는 몇 점 없었고 반찬은 멀건 깍두기였다. 윤형근은 음식으로 사치를 부리거나 많이 먹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점심 찬밥 한 덩이에 총각김치 몇 개로 때우다. 그저 배만 적당히 채우면 족하지 무엇이 필요하나. 무엇을 먹어도 나는 왜 자꾸만 고마운 생각만 들까.” (1979년 6월 27일의 일기에서) 작업실도 음식과 음악의 취향도, 심지어 캔버스 뒷면에 하는 사인도 정갈하면서도 단순했다.

그러나 힘들게 기회를 얻어 해외에 나가면 식욕이 돋아났다. 동경에 도착한 첫날은 으레 동경화랑, 우에다화랑 등 긴자 일대에 점재해 있는 화랑을 방문하기 전에 한 시간이라도 짬을 내어 긴자 7정목에 있는 ‘긴자 라이온’을 찾았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고색창연한 맥주 홀이다. 일 층은 천정이 높았다. 나이든 장인은 최상의 비율로 거품이 얹히도록 능숙한 솜씨로 노즐에서 생맥주를 뽑아내었다.

황현욱이 세운 인공갤러리 경제적 지원

서교동 작업실 앞에서 가족과 함께. [사진 윤성열]

서교동 작업실 앞에서 가족과 함께. [사진 윤성열]

오랜 숙성의 시간이 빚어내는 두툼한 맛의 에비스 생맥주 한잔에다 자우어크라우트가 곁들여 나오는 소시지 안주를 더하면 드디어 동경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화랑 일을 보고는 박서보, 정상화, 이우환 등과 함께 긴자 1정목의 세이코우엔(淸香園)에 가서 불고기를 먹었다. 1983년 6월, ‘한국현대미술전-70년대 후반 하나의 양상’전에 참가했을 때의 장면이지만 그 이전도 이후도 상황은 반복적이었다. 세이코우엔 멤버가 박서보, 이우환, 하종현, 오광수, 심문섭 등으로 바뀔 뿐이었다.

윤형근은 1961년부터 숙명여고에서 미술 교사로 근무했다. 1973년 숙명여고 부정입학 사건을 두고 교장에게 이의를 제기했는데, 레닌 모자를 쓰고 다닌다는 엉뚱한 구실을 붙여 반공법 위반으로 경찰에 구속되었다. 그 길로 숙명여고를 사직했다. 작업에 전념했다. 1984년, 늦은 나이에 경원대(가천대) 교수가 되었다가 1990년에는 총장에 취임한다.

“다들 죽었다/ 이일도 죽고 한창기도 죽고 조셉 러브도 죽고 도널드 저드도 죽고 황현욱이도 죽고 나만 지금껏 살아있고나/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은 다 죽었구나.” (2004년 5월 8일의 일기에서) 윤형근은 황현욱을 좋아했다. 황현욱이 1988년 대학로에 인공갤러리를 세울 때, 경제적인 지원을 했다.

황현욱은 미국의 미니멀 아트 작가 도널드 저드(1928~1994)의 전시회를 여는 게 꿈이었다. 도널드 저드의 전시회가 마침 오사카의 야마구치화랑에서 열리기로 되어있었다. 야마구치는 윤형근을 존경했다. 1991년 윤형근의 설득으로 야마구치에 전시될 도널드 저드의 작품들이 서울에 먼저 전시되는 조건으로 인공갤러리 전시가 성사되었다. 동갑내기인 저드와 윤형근은 만나자마자 의기투합했다. 저드의 주도로 윤형근은 1993년과 1994년에 뉴욕과 텍사스 말파의 저드파운데이션에서 개인전을 하였다. 저드 주변의 세계적인 문화계 인사들이 몰려들어 윤형근의 작품에 찬사를 보내었다. 저드는 말파에 있는 그의 집 침실에 윤형근의 그림을 침대 머리맡에다 걸어두고는 우정을 되새겼다.

윤형근은 나무를 좋아했다. 서교동 작업실의 문은 캔버스의 나무틀과 같은 재료인 삼나무 판재를 몇 개 이어붙여 만들었다. 문을 여닫을 때마다 피톤치드가 풍겼다. 오대산에 갔을 때 생생한 거목도 쓰러져 썩으면 흙이 되는 걸 보았다. “내 그림 명제를 천지문(天地門)이라 해본다. 블루는 하늘이요, 엄버는 땅의 빛깔이다. 그래서 천지(天地)라 했고 구도(構圖)는 문(門)이다.” (1977년 1월의 일기에서) 나무의 후신이 흙이라면 흙의 전신은 나무다. 필경 다 사라져 하늘로 소멸한다. 그림 속의 작대기는 전신과 후신이 땅과 하늘로 이어져 현상의 이쪽을 본질의 저쪽으로 열어주는 문이 되었다. 윤형근은 그 문을 열고서 수화, 향안, 이일, 한창기, 조셉 러브, 도널드 저드, 황현욱이 소멸한 짙푸른 하늘로 갔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