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양성희의 시시각각

역사적 왜곡과 상상 사이

중앙일보

입력 2022.01.05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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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1980년대를 배경으로 남파 공작원과 여대생의 안타까운 로맨스를 그린 JTBC 드라마 '설강화'. 사전에 알려진 일부 정보가 확대해석,전파되면서 역사왜곡이란 딱지가 붙어버렸다.             [사진 JTBC]

1980년대를 배경으로 남파 공작원과 여대생의 안타까운 로맨스를 그린 JTBC 드라마 '설강화'. 사전에 알려진 일부 정보가 확대해석,전파되면서 역사왜곡이란 딱지가 붙어버렸다. [사진 JTBC]

‘일몰의 저편’이라는 일본 소설이 있다. 성애 소설가가 ‘문예윤리위원회’라는 정부 기관에 끌려와 정신교육을 받는다. 소설이 강간을 미화했다고 고발당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올바름과 ‘캔슬 컬처’(SNS 팔로를 취소하는 것처럼 인권 감수성이 낮은 문화인이나 작품·캐릭터를 보이콧하는 문화) 등 최근 문화계 흐름을 반영한 2020년 작품이다. 정치적 올바름이 창작의 자유의 대척점에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올바름을 향한 윤리적 열정을 간직하되 그 열정을 ‘올바름’ 자체를 의심하고 상대화하는 데까지 밀어붙일 필요가 있다”는 문학평론가 한영인의 말에 공감한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시대극의 역사 왜곡 논란이 한창이다. 1980년대를 배경으로 남파 공작원과 여대생의 로맨스를 그린 JTBC ‘설강화’ 얘기다. 방송 첫 주 만에, 아니 방송 전부터 ‘민주화운동 폄훼’ ‘안기부 미화’ 낙인이 찍혔다. 36만여 명이 드라마 폐지 청원을 했다. 법원은 한 시민단체의 드라마 상영 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드라마가 점차 진행되면서 안기부 요원이 미화되거나 간첩이 민주화운동을 주도하지 않는다는 점이 밝혀졌지만(주인공들은 남북의 정략적 뒷거래의 희생양이 될 듯하다), ‘역사 왜곡파’들은 요지부동이다. 막상 까보니 ‘안기부 미화’가 아니라 권력욕에 허둥대는 ‘안기부 조롱’ 아니냐는 의견에도 조롱거리라는 인간적 묘사가 바로 미화라고 일침을 놓는다. ‘드라마는 드라마로 보자’라거나 창작 위축을 우려하는 글에도 안이한 역사의식을 질타한다. 한낱 사랑놀음에 80년대를 들러리 세우며 엄중한 시대상을 훼손한다는 목소리다.
이전까지 각종 대체역사극을 수용하던 대중 정서의 변화는 2020년 ‘철인왕후’(tvN)가 기점이었다. 남자 영혼이 깃든 왕후라는 파격적인 설정을 실존 인물(철종)과 연결한 게 역사 왜곡 논란으로 이어졌다. 지난해 ‘조선구마사’(SBS)는 방송 2회 만에 전격 폐지됐다. 태종·세종 등 실존 인물을 엑소시즘과 연결한 데다 중국풍 소품과 의상으로 반중 정서를 건드린 결과다. 광고협찬사 압박, 제작진 사상 검증, 배우 보이콧, 드라마 폐지 청원 등 집단적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가상의 조선 왕이 남장여자이고 궁궐 곳곳에서 남자 신하와 키스를 하는 ‘연모’(KBS)가 성공한 로맨스 사극으로 받아들여진 것과의 차이다. 역사에 판타지적 상상력을 결합하되, 그것이 지금 현실의 시대적 상상력에 여하히 부합하느냐가 대중의 호ㆍ불호를 가른다는 분석도 있다.
 아마도 ‘설강화’의 잘못이라면 우리 사회에 80년대가 여전히 뜨거운 감자임을 간과했다는 점 아닐까. 그러나 방송 1~2회 만에 드라마 폐지 청원을 반복하는 폭력적 방식은 과연 온당한가. 시청자 주권만큼 창작의 자율성도 존중받아야 한다. 생각 다른 이들의 볼 권리 또한 중요하다. 온라인에는 이미 다음번 문제 드라마 리스트가 나돈다. 중국 소설 원작이거나 중국 자본이 들어와 ‘친중ㆍ역사 왜곡’ 의혹이 있다면서다.
드라마에 대한 평가는 개인에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판단은 작품을 제대로 보고 시장에서 시청률로 하면 될 일이다. 무엇보다 역사적 왜곡과 드라마적 상상의 경계는 무엇인가, 표현의 자유와 그 한계는 무엇인가, 중요한 논의가 빠졌다. 또 80년대에 대해 허용된 드라마적 상상력이 단 하나(리얼리즘)고 나머지는 왜곡이라면, 그게 바로 80년대식 폭력 아닌가.
 한 원로 드라마 PD가 전화를 걸어왔다. “80년대 한국 사회가 싸워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민주화, 언론과 표현의 자유 아닌가. 그 자유를 무시하는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목소리가 침통했다. 알다시피 80년대 민주화는 90년대 검열 철폐로 이어졌고, 90년대 문화의 시대가 열리며 한류의 싹이 텄다. 표현의 자유를 양분 삼아 한국 사회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그린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 BTS가 이룬 것에 대해 더 얘기할 필요는 없겠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드라마 평가 다양할 수 있지만
무차별적 비난·낙인찍기는 폭력
표현의 자유가 민주화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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