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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 속의 풍요」 누리는 자영업자|중국 야시장·농공단지 르포-이춘성 특파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중국의 자영업자들은 「빈곤 속의 풍요」를 만끽하고 있다. 일한 만큼 벌 수 있는 이들은 사회주의 체제안의 부르좌인 셈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국인민들은 아직도 형편없이 낮은 생산성과 비효율성으로 대변되는 사회주의경제의 틀 속에 놓여있다.
무사안일의 국영과 이제 정지가 끝나 축성중인 거티후(자영업자)의 실상을 현지 르포를 통해 알아본다. <편집자주>
북경 안정문외대가에 있는 디탄 공원에는 아시안게임을 기념하는 임시 양마당이 섰다.
우리로 치면 말썽 많았던 여의도 국풍이나 등촌동 새마을야시장쯤 되는 행사다.
이 양마당에는 양·소·돼지·닭·오리고기 등 육류요리는 물론 메추리구이·새우등 해물튀김 등 온갖 「먹자판」이 벌어졌다.
이와 함께 시내 각 백화점에 있는 의류·완구류 등 수입외국상품 및 중국산제품들이 선보였다.
이곳에서 장사를 하는 부류는 두 가지로 대별된다. 자영업자인 거티후와 국영상점이다.
자영업자들은 지난9월16일부터 이달 8일까지 좌판을 벌이는 대가로 이곳 노동자 평균월급을 웃도는 3백원을 당국에 냈다. 반면 국영상점들은 한푼도 자릿세를 내지 않았다.
무려 3백원이나 되는 「거금」을 내고도 이곳에 자리를 잡기는 쉽지 않다. 우선 시내중심번화가 왕부정 뒤편 동안문야 시장의 영업허가를 갖고 있은 개체호에만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
이같은 「무리한」조건에도 불구하고 지단 양마당에는 2백50개의 크고 작은 식품포장마차가 들어섰다.
이들은 평일에는 장사가 신통치 않지만 휴일인 일요일과 국경일등 많은 인파가 이곳을 찾을 때면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 잘하면 휴일 하루에만 3백∼4백원씩의 매상을 올릴 수 있다.
중국식 찹쌀탕인 탕원을 판쑨하이보(22)씨는 여 종업원 1명까지 둔 어엿한 자영업 사장이다. 고졸의 전직 요리사인 손씨는 월2백원의 급료를 받는 월급쟁이를 뛰쳐나와 독립, 이 장사를 하고 있다. 평일에도 1백원정도 수입을 올렸으며 휴일에는 그 몇 배를 팔아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
고용원인 왕위란(22)양 역시 고졸출신에다가 전직 호텔종업원이었다. 왕양은 『호텔 일이 남 보기에는 화려하지만 일이 고되어 포기하고 대업(당국이 직장을 정해줄 때까지 기다리는 일)중에 있다가 30원씩의 일당을 받기로 계약하고 이 일을 하고 있다』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녀는 호텔에서는 일당이 4원에 불과, 임시직장인 장마당이 철시되더라도 다시는 전 직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
두개에 1원하는 한국 매화빵을 구워 파는 김옥춘씨(48·여)는 조선족. 하얼빈에 살다가 5년 전 두 아들과 며느리·두 손녀 등 일가가 북경으로 이주해온 이후 동안문야시에서 같은 장사를 해오고 있은 김씨는 온 식구가 이 일에 교대로 매달려 월1천원의 매출을 올린다고 했다.
밀가루는 물론 찹쌀·콩가루·녹두가루·달걀·우유·땅콩·다래·설탕 등 재료가 많이 들어 이것저것 빼고 나면 크게 남는 것은 없지만 그래도 하얼빈에서 농사를 지을 때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천진에 본사를 두고 있은 꽈배기를 파는 류정시앙(42)씨는 개당 가격이 7.5각(0.75원)이지만 하루 평균 1백40∼1백50원어치씩을 팔아 시내에서 장사를 할 때보다 수입이 훨씬 나은 편이라며 양이 파하게 되는 점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이들 자영업자들이 열심히 물건을 만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목청을 돋워 끌어들이는 반면 국영상점인 옷가게 등은 호객행위를 하기는커녕 세월만 가라는 식이다. 오히려 손님이 이것저것 값을 따져 묻고 물건을 고르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 일쑤다.
물건이 많이 팔리나 적게 팔리나 자신들이 받는 월급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들 국영상점 종업원들의 봉급은 월 노임 1백10원 선에 보너스 형식의 장려금 50∼80원등 잘해야 2백원.
익명을 요구한 한 여종업원(34)은 『당국이 이번 행사 말고도 연초나 국경일등에는 백화점마다 강제로 할당, 장사를 하게 해 피곤하다』며 『아시안게임이 빨리 끝나고 편하게 백화점에서 근무하고 싶다』고 했다.
역시 국영인 북경시 과학위에서 주관하는 각종 전오자락센터의 종업원들도 마찬가지의 태도다.
우리 식의 유원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농구공던지기·과녁 맞히기·전자총 쏘기 등은 1회에 5각(0.5원)을 받고 1등 상품으로 소형 플래스틱 선풍기를 주고 있는데 이들 오락센터의 종업원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을 뿐 들락거리는 「고객」들에게는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는 것이다.
능력껏 일해 돈을 버는 자영업자와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않은 봉급생활자, 다시 말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혼재돼 있는 오늘날 중국의 현주소를 단면으로 보여 주는 현장이 지단 참마당인 셈이다.
북경 천안문광장으로부터 30㎞ 떨어져있는 통현 통현진에는 3백60가구 9백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과원촌으로 불리는 통현진은 우리로 치면 농공단지 시범부락.
그렇다고 해서 농업이 주업은 아니다. 지난 한햇동안 이 마을 총생산에서 농업의 비중은 겨우 0.78%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통현으로 가는 길에는 옥수수·배추·파·고추밭이 양옆으로 펼쳐져 있다. 드문드문 벽돌공장도 서 있다. 두필 혹은 세필의 말이 끄는 수레도 다녔다.
담배 몇 갑을 좌판에 늘어놓고 한담을 나누는 노인네들의 모습이 여유스럽게까지 보였다. 영락없는 1960년대의 한국상황이다.
왕훙취안(50) 진장과 류스제 성관진 농공상 연합공사 경리(49)가 안내를 맡았다.
현 중심가의 상점진열대마다 바나나·사과 등 과일이 풍족하리만큼 쌓여있었다. 야채도 가득 진열돼 있었다. 왕진장이 『거티후(자영업자)』라고 설명했다.
바나나 값은 헐했다. 보통 크기의 15개 한다발이 10원. 우리 돈으로 1천5백원.
과원촌 사무실의 2층회의실 앞뒤 벽에는 이 마을의 현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차트가 걸려있다.
89년 마을의 총생산액은 9백68만원. 공업이 47%인 4백55만원, 상업 2백57만원(26.5%), 건축업 2백51만원(26%), 농업 7만6천원, 운수업 6만7천원(0.7%)의 순이다.
중국인구의 80%가 농민으로 알고 있는데 어찌된 일이냐는 질문에 대답은 간단했다. 『북경근교는 여타지방과는 달리 공업과 상업의 비중이 매우 크다』는 것이었다.
『과원촌이면 과수원이 많겠다』고 묻자 유경리는 『명·청조에는 이 일대가 전부 과수원이어서 그같은 마을이름이 붙었다』고 유래를 설명해주었다.
개발도상에 있는 중국의 현상을 그대로 보여 주는 현장에 와있는 느낌을 받았다.
70년대 후반 서울의 강남개발붐에 이어 주변의 안양·부천 등의 과수원이 집터로, 공장으로 변한 것과 조금도 다름없는 상황이 이곳에서 재연되고 있었다.
덩샤오핑의 개방경제도입이 본격화되기 직전인 80년 과원촌의 총생산액은 35만6천8백원. 그러던 것이 85년 4백만원, 87년 5백60만원, 88년에는 7백35만원으로 급증추세를 탔다.
자영업의 허용이라는 부분적인 자유경쟁의 시장경제체제 도입의 효과가 가속된 것이다.
마을 인근에서 개체농을 하고 있는 한마오린씨(61)집을 방문했다.
대지 40평에 건평 20평의 2층 양옥. 지난해 지방정부가 4만원씩에 지어 2만원씩에 「능력있는」 자영업자들에게 불하한 집이다. 나머지 2만원은 장기분할 상환을 한다고 했다.
양옥이라곤 하지만 60년대 서울의 시영아파트 수준. 그러나 이 정도의 집이면 중국에서는 중상급에 속한다.
폭2m·높이2m 정도의 대문을 들어서며 『왜 이리 대문이 작으냐』고 묻자 한씨는 『차가 들어가지 않아도 돼 불편하지 않다』며 웃었다.
현관을 들어서니 곧바로 응접실. 신을 신은 채로 입식생활을 하는 중국전통의 내부구조였다. 무단(목단)표 컬러TV·봉황표 냉장고·6인용 응접세트가 있었다.
냉장고 하단냉장실에 야채가, 냉동고에는 쇠고기·돼지고기·양고기가 가득 차 있었다.
주방에는 프로판 가스통이 놓여있고 3개의 가스대가 설치돼 있었다.
공장에 다니는 막내아들과 농사를 짓는 한씨 내외·장남 등 가속 모두의 연소득은 총2만원선.
이 마을 1인당 GNP가 1천7백30원인 것과 비교하면 한씨 일가는 재력을 갖춘 이른바 하오푸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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