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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정조 “임금은 나 하나, 이에 대한 도전 절대 용서 못해”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59)

애련정에서 의두합쪽으로 내다본 풍경. [사진제공 이향우]

애련정에서 의두합쪽으로 내다본 풍경. [사진제공 이향우]

불로문과 애련정

도교에서는 사람이 선한 일을 거듭해 도의 경지에 이르면 늙지 않고 죽지않는다고 했다. 십장생 중 하나인 돌로 만든 불로문(不老門)은 도교적 영향의 신선사상을 담고 있다. 이문 안에 들어서는 사람들이 늙지 않고 오래도록 살라는 축원을 담았다. 한 장의 판돌을 쪼아‘⨅’자 모양의 문을 만들어 연경당 가는 길에 세웠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연경당으로 가는 길목에 부왕 순조의 불로장생을 위해 이곳에 불로문을 세웠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의 일은 알 수 없어서 효명세자는 스물두 살의 약관에 요절하고 아버지에게 불효를 저질렀다.

불로문과 애련정 부분. 동궐도(고려대학교 소장) 사본. [사진제공 이향우]

불로문과 애련정 부분. 동궐도(고려대학교 소장) 사본. [사진제공 이향우]

말 그대로 풀이하면 이문을 지나는 사람은 보톡스나 성형수술에 의존하지 않고도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그 효과는 지금 당장 나타나는 게 아니고 아주 천천히 자연스럽게 드러나니 절대로 조급하게 서둘러 확인하려 하지 마시기를 바란다.

불로문을 지나 들어서면 네모난 큰 연지와 북쪽 언덕을 배경으로 애련정(愛蓮亭)이 있다. 애련은 연꽃을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송나라 때 염계 주돈이가 연꽃을 사랑하는 마음을 글로 쓴 애련설(愛蓮說)이 유명하다. 숙종의 ‘애련정기(愛蓮亭記)’에는 연꽃은 더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변하지 않고, 우뚝 서서 치우치지 아니하며 지조가 굳고 맑고 깨끗하여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에, 이러한 연꽃을 사랑하여 새 정자의 이름을 애련정이라고 지었다고 적고 있다.

애련정의 가을. [사진 이향우]

애련정의 가을. [사진 이향우]

사람들은 애련정이 발 담그고 있는 연지와 정자를 바라보는 아름다운 경관에 취해 이 가을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애련정의 아름다운 자태가 물속에 빠진 풍경은 그야말로 감탄을 자아내는 빼어난 경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늘 이르는 말은 애련정을 지은 목적은 바라보기 위해서가 아닌 그곳에 앉아 바깥 경치와 물에 비치 자연을 즐기기 위한 것이었다. 애련정이라는 이름은 정자가 안고 있는 연지의 연을 감상하려는 계절적인 배려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애련정에 앉아 즐기는 시선을 최대한 따라가야 하지 않겠는가. 부디 애련정을 불로문을 통과한 연지 가장자리에서 바라만 보고 감탄하지 말고 조금 더 걸어서 정자의 마루와 수평이 되는 지점까지 다가간 후 정자 기둥 낙양각 안으로 들어오는 풍경을 붙들기를 권한다.

관람정

애련정을 지나 북쪽으로 가다보면 풍광 아름다운 곡지(曲池)가 나오는데 이 일대는 고종이나 순종 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동궐도에 그려진 몇 개의 작은 연지가 하나의 물로 통합된 형태이다. 그리고 조금 더 가서 물가 낮은 곳에 숨은 듯 앉아있는 정자를 만날 수 있다. 계단을 밟고 물가로 내려가면 정자 정면의 아주 특이한 파초 잎사귀 모양의 편액을 보게 된다. 정자의 이름이 볼 관(觀), 닻줄 람(纜)을 써서 관람정(觀纜亭)이다. 배에서 ‘닻줄을 내리고 물을 바라본다.’라는 뜻인데, 정자에 앉아서 연못을 바라보면서 마치 큰 물, 강이나 바다에서 배를 타고 닻을 내려 그 물을 즐기는 형상을 이름에 그대로 넣은 것이다. 물에 배 띄워 노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정자이다.

관람정 기둥과 기둥사이의 낙양각은 이 정자 안으로 들어오는 풍경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 아름다운 낙양각은 실은 열린 공간의 정자에 횡력을 보강하기 위한 부재인데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담아내는 프레임 장식 같은 미적 효과를 톡톡히 보여주고 있다. 이 관람정에서는 아주 약간만 시선을 움직여도 수 만 가지 선경을 만들어내는 경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관람정의 지붕 구조가 부채 살 펼친 듯한 모양으로 선자정(扇子亭)이라고도 부른다.

부채살 모양의 관람정 지붕 구조. [중앙포토]

부채살 모양의 관람정 지붕 구조. [중앙포토]

관람정에서 시선을 조금 들어 위를 보면 맞은편 언덕에 승재정(勝在亭)이라는 잘생긴 정자가 보인다. 말 그대로 경치가 좋은 곳에 둔 정자인데 아마도 승재정에서는 하늘에서 물을 내려다보는 풍광으로 관람정과 물을 함께 감상했을 것이다. 물길을 아래 두고 관람정에서 즐기는 물놀이와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시원한 구도의 승재정이 마주보고 있다. 정자의 배치에 따라 산속에 앉은 느낌과 흐르는 물위에서 즐기는 뱃놀이처럼 정자와 물의 배치 관계는 매우 다양한 풍광을 만들어 낸다.

다시 계단을 올라와 관람정 위쪽에 보이는 돌다리를 건너서 또 다른 정자가 있는 곳으로 간다. 다리를 건너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갈 때 공간을 이동하는 것은 다른 세계로의 진입을 의미하기도 한다. 작은 돌다리를 건너서 만나게 되는 주체는 바로 존덕정이다. 그리고 작은 물길 위에 세운 이 다리는 정자에 펼친 정조의 글을 자연 형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존덕정

작은 석교를 건너 반월 연지에 둘러 싸인 존덕정(尊德亭)에 이르게 된다. 존덕정은 ‘덕을 높이다’라는 뜻의 이름으로 두 겹 지붕에 원기둥으로 퇴를 두르고 있는 마루와 천장 닫집의 청룡, 황룡까지 그 격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존덕정은 관람지 일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인조 때인 1644년 건립되었다. 육각형 정자에 덧퇴를 달아 퇴에 한 켜의 지붕을 덧씌운 건물로 기둥이 모두 원주(원형기둥)로 건물에 쓰이는 기둥의 형식만 보아도 격이 높은 건물이다. 더구나 기둥 사이의 풍혈에 장식된 박쥐나 칠보 등 각종 길상 문양은 존덕정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동궐도에는 존덕정 뒤편의 작은 문을 통해 청심정으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문은 없어지고 문 옆에 그려져 있던 은행나무가 고목이 되어 지켜본 오랜 세월을 짐작하게 하고 있다.

중앙의 정자가 존덕정, 우측의 정자가 관람정이다. [사진 서울관광재단]

중앙의 정자가 존덕정, 우측의 정자가 관람정이다. [사진 서울관광재단]

정자 내부는 보개천장으로 장식을 하고 쌍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것을 그려서 왕권을 상징한 것을 볼 수 있다. 정자 안쪽 북쪽 창방 위에 ‘어제만천명월주인옹자서(御製萬川明月主人翁自序)’가 보인다. 정조 22년(1798)에 쓴 글로 “달은 하나요 물의 흐름은 일만 개나 되는데 물은 이 세상 사람들이요 달은 태극(太極)이며 그 태극은 바로 나다”라고 왕은 말했다. 정조 자신을 달에 비유해 달빛이 만개의 개울을 고루고루 비추듯 만백성을 보살피겠다는 애민사상과 ‘하늘의 달이 하나이듯 임금도 오로지 정조 자신 하나뿐이니, 이에 대한 도전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강력한 왕권을 주장한 개혁 군주로서의 정치관을 읽을 수 있다. 정조는 그의 신하들을 향해 말했다.

“나의 뜻에 따르는 것이 태극과 음양오행에 합당한 일이며 우주의 원리를 거스르지 않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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