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각성되지 않은 정의감은 잔인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JTBC 홈페이지 캡처]

[JTBC 홈페이지 캡처]

지금으로부터 17개월 전 국회에서 장관 후보자 신분이었던 이인영 통일부 장관과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갔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중이었는데도 김정일이 남한을 적화통일하겠다고 간첩을 내려보내 지하당 조직 복구 활동을 했다면서 한 얘기다. 대충 줄여 전하면 이렇다.

간첩 운동권 오인에 “민주화 왜곡” #JTBC ‘설강화’ 방영중지 요구 부당 #성역 건드릴 수 있어야 민주사회

▶태 의원=“『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를 읽어봤느냐.”
▶이 후보자=“나와 관련된 부분들이 질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발췌도 해서 보았다.”
▶태 의원=“다행히 잘 처신했더라. ‘기관원이다’라면서 간첩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와 대화를 거부했다. 그런데 문제는 신고 안 했더라.”
▶이 후보자=“내가 간첩으로 인지했으면 신고해야 마땅하고 간첩으로 인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고하지 않은 건 일관된 행위 아니겠나.”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는 남파간첩 김동식의 회고록이다. 90년 남파 땐 서울에서 암약하던 북한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이선실과 포섭된 탄광 파업 노동가와 월북했다. 95년엔 386 운동가를 포섭하라는 지시를 받고 활동하다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검거됐다. 김동식은 “공작 대상인 J·I·H·L·U·E 등을 만나 포섭을 시도했으나 응하지 않아 실패했다”고 적었다. 이 후보자를 포함해 대상 대부분이 기관원(안기부)의 역공작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그러나 널리 알려졌다시피 북한에 다녀온 사람도 있다. ‘강철서신’의 저자이자 주사파의 대부로 불리는 김영환이다. 91년 김일성을 만났고 ‘관악산 1호’가 됐다. 이후 만든 지하당이 민족민주혁명당인데 경기남부위원장이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이었다.

북한 대남 공작의 전모를 알게 될 수 있을까. 현재로선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독일 통일 후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의 방대한 서독 내 스파이 활동이 드러났듯, 북한 기록에 접근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온다면 혹여 모르겠다.

이 얘기를 한 건 JTBC 드라마 ‘설강화’ 때문이다. 방송 전에는 물론이고 방송 후에도 청와대 국민청원에 방영을 금지해 달라는 글이 올랐고 수십만 명이 동조했다. “민주화운동의 가치를 훼손하는 드라마의 방영은 당연히 중지되어야 하며 역사 왜곡”이라던데, 여주인공이 간첩인 남주인공을 운동권으로 오인해 구해 주고 안기부 직원으로 나오는 이의 배경음악으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가 나온 설정을 두고 이런 모양이다.

청원대로 민주화운동 당시 간첩으로 몰린 운동권 피해자가 적지 않다. 이는 우리 사회가 끊임없이 또 철저하게 반성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극소수라곤 하나 동조자가 있었다. 설령 단 한 명도 없었더라도 이 정도의 상상을 두고 방영 중지란 단죄를 해야 하나 의문이다.

설강화에 참여한 사진작가가 이런 글을 올렸다. “(방영이 중단되면 앞으로) 작가는 70~80년대를 그리고 싶은데 자꾸만 머릿속에 폐지된 설강화가 떠오를 거다. 방송으로 나가야 하니까 ‘이 정도 수위면 될까’ 끊임없이 자기검열을 하게 될 거다. 좋은 민주주의 사회는 법을 위반하지 않는 선에서 불편한 창작물이 자유롭게 제약 없이 빛을 보는 것이다. 창작자가 소위 말하는 성역을 얼마든지 자신 있게 건드릴 수 있는 것, 그래도 창작자 본인에게 안전을 포함해 아무런 불이익이 없어야 한다. 불편하다고 세상에서 아예 사라지게 하는 건 극히 위험하다.”

공감한다. 법으로든 디지털 ‘멍석말이’로든 역사 문제에 완력을 행사하는 건 비민주적이다. 철학자 최진석은 “각성되지 않는 정의감은 각성된 불의보다 잔인하다. 각성되지 않은 사명감은 각성된 게으름보다 무모하다”고 질타했다. 과거를 흠잡을 데 없이 도덕지향적으로 재구축하려 한다고 역사적 사실이 사라지나.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원하는 세상에 두드려 맞출 순 없다. 물론 관용 사회라 하더라도 불관용을 해야 할 때가 있긴 하다. 극단적 소수가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도 있어서다. 이번엔 아니다.

고정애 논설위원

고정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