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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키신저 첫날 7시간 마라톤 회담, 닉슨 방중 합의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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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8호 36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08〉

1972년 2월, 중국 방문을 위해 미국에서 출발하는 날 백악관 직원들과 출국 인사 나누는 닉슨. [사진 김명호]

1972년 2월, 중국 방문을 위해 미국에서 출발하는 날 백악관 직원들과 출국 인사 나누는 닉슨. [사진 김명호]

1971년 7월 8일 오전, 키신저를 에스코트할 중국 접대조(接待組)가 이슬라마바드 국제공항 특별구역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던 주파키스탄 대사 장통(張彤·장동)과 눈인사 나눌 겨를도 없었다. 대사관저로 직행했다. 오후 8시, 야히아 칸이 대통령 궁에 저녁을 마련했다. 참석자는 육군 참모총장과 국가안전위원회 의장 등 극소수였다.

야히아 칸이 키신저의 근황을 설명했다. “어제 고관 90명이 키신저 환영 만찬을 열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키신저가 복통을 호소했다. 내가 큰 소리로 이슬라마바드는 고온지역이다. 공기 좋은 산속 휴양지에 가서 며칠 쉬는 것이 회복에 유리하다고 외쳤다. 키신저는 배 움켜쥐고 오만상 찡그리며 사양했다. 무슬림 국가에서 손님은 주인의 안배에 복종해야 한다며 화를 내자 어쩔 수 없다는 표정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키신저를 수행한 정보기관원이 휴양지에 조사를 갔다. 전화로 치료에 적합한 지역이 아니라는 보고에 기겁했다. 휴양지에 감금시켰다.”

특공 2명, 수갑 찬 손에 연결된 가방 들어

중국의 유엔가입 후 유엔대표로 국제사회에 모습을 드러낸 슝샹후이(앞줄 왼쪽). [사진 김명호]

중국의 유엔가입 후 유엔대표로 국제사회에 모습을 드러낸 슝샹후이(앞줄 왼쪽). [사진 김명호]

7월 9일 새벽 3시 30분, 공항에 도착한 접대조는 비행기 안에서 키신저 일행을 기다렸다. 1시간 남짓 후, 흑색 선글라스에 중절모를 눌러 쓴 통통한 남성과 30대 초반의 미국인 5명이 탑승했다. 3명은 수행원이고 2명은 수갑 찬 손에 연결된 가방을 든 특수공작원(특공)이었다.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 행선지를 안 특공들은 인민복 입은 접대조를 보고 긴장했다. 적의를 감추지 않았다.

소개가 끝나자 키신저가 탕원셩(唐聞生·탕문생)에게 호의를 표했다. “낸시 탕을 만나서 반갑다. 그리니치 빌리지의 가로수는 여전하다. 맨해튼 산책할 날이 머지않았다.” 중국 측은 무슨 말인지 의아했다. 탕이 내력을 설명하자 미국의 정보력에 혀를 내둘렀다. 조장 장원진(章文晉·장문진)이 인사말을 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총리는 박사와 폭넓은 의견 교환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키신저는 보안을 강조했다. “워싱턴에서 이 일을 아는 사람은 닉슨 대통령과 내 수석 보좌관 헤이그 대령 외에는 없다.” 훗날 탕원셩은 키신저의 첫인상을 구술로 남겼다. “지식이 풍부하고, 활기가 넘쳤다. 영어 발음은 신통치 않았다. 처음엔 알아듣기 힘들었다.”

베이징 도착 첫날, 키신저와 저우언라이는 오후 4시 25분부터 회담을 시작했다.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예젠잉(葉劍英·엽검영), 캐나다 대사 황화(黃華·황화), 접대조 조장 장원진과 조원 왕하이룽(王海容·왕해용), 탕원셩 외에 슝샹후이(熊向暉·웅행휘)가 키신저 일행과 자리를 마주했다. 저우의 환영사에 이어 키신저가 두툼한 원고 뭉치를 읽기 시작했다. “지금 나는 가장 신비한 나라에 와 있다”라는 구절에 저우가 발언을 중지시켰다. “중국은 신비한 나라가 아니다. 이해가 필요한 국가라는 것을 이미 발견했으리라 믿는다.” 키신저는 무슨 말인지 알아챘다. 원고를 덮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가 중국에 온 이유는 닉슨 대통령의 중국방문 일정 조율과 예비회담, 두 가지다.” 저우가 말을 받았다. “중·미 쌍방은 국제문제를 대하는 방법이 다르다. 중·미관계는 평등이 최우선이라야 한다. 대등한 입장에서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양국 인민은 우호를 원한다.” 저우가 닉슨 방문 시기를 건의했다. “1972년 여름이 좋다.” 키신저의 생각은 달랐다. “차기 대통령 선거와 간격이 짧다. 득표 공작이라는 오해를 받기 쉽다.” 저우가 72년 봄을 제의하자 키신저도 동의했다.

마오, 훗날 유엔대표 슝샹후이 참석 지시

비밀방문 3개월 후 다시 중국을 방문한 키신저. 1971년 10월 22일, 베이징. [사진 김명호]

비밀방문 3개월 후 다시 중국을 방문한 키신저. 1971년 10월 22일, 베이징. [사진 김명호]

1차 회담은 밤 11시 30분까지 7시간이 걸렸다. 녹초가 된 저우언라이가 왕하이룽을 불렀다. “주석에게 결과를 보고해야 한다. 언제가 좋을지 물어봐라.” 왕이 수화기를 들고 되물었다. “동행이 있습니까?” 저우는 멈칫했다. “왕하이룽과 탕원셩이 함께 한다고 전해라.” 잠시 나갔던 왕이 “지금 당장, 슝샹후이도 함께 오라”는 마오의 지시를 보고했다. 저우는 왕과 탕을 먼저 마오의 서재로 보냈다. 슝과 함께 문건 챙겨 들고 뒤를 따랐다.

저우언라이가 회담 내용을 보고하려 하자 마오쩌둥은 손을 내저었다. “서두를 필요 없다. 급한 일 아니다.” 담배를 물고 슝샹후이에게 미소를 보냈다. 생각지도 않았던 질문을 했다. “남들에게 위생과 건강을 역설하는지 궁금하다.” 무슨 뜻인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슝을 왕하이룽이 도와줬다. “담배를 피우냐고 물으셨습니다.” 탕원셩이 대답을 대신했다. “골초 수준입니다.” 마오는슝에게 담배를 권하며 즐거워했다. “담배를 끊으라는 의사의 닦달이 심하다. 나 위한다며 의사 편드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 의사에게 강제로 흡연권을 박탈당하기 싫다. 고립된 채 혼자 피운다. 오늘은 슝샹후이 덕에 고립에서 해방됐다.” 마오의 농담은 계속됐다. “손과 입이 부지런해야 두뇌가 잘 돌아간다. 나는 중요한 문건을 직접 보고 의견을 첨부한다. 현재 중국은 대관(大官), 소관(小官) 할 것 없이 손과 입이 게으르다. 무슨 일이건 비서에게 의존한다. 개중에는 부인이 판공실(비서실) 주임인 사람도 있다. 국민당이나 하던 못된 행동이다.” 마오의 서재를 나온 슝은 등골이 서늘했다. 부인이 판공실 주임인 사람은 부주석 린뱌오(林彪·임표) 외에는 없었다. 린뱌오는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반대했다. 사색이 된 저우언라이가 슝에게 당부했다. “오늘 주석이 한 말을 절대 발설하지 마라.”

2개월 후 린뱌오 일가는 중국을 탈출, 몽골 사막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이 엄청난 사건도 미·중 관계 개선에는 영향이 없었다. 린뱌오 사망 1개월 후, 키신저가 알렉산더 헤이그와 함께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중국을 찾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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