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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닉슨 베이징 회동 위해 저우·키신저 ‘007 작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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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7호 33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07〉

중국 비밀방문 이튿날, 두 번째 회담을 마친 저우언라이와 키신저. 1971년 7월 10일, 베이징 인민대회당. [사진 김명호]

중국 비밀방문 이튿날, 두 번째 회담을 마친 저우언라이와 키신저. 1971년 7월 10일, 베이징 인민대회당. [사진 김명호]

1971년 5월 2일, 파키스탄 주재 미국대사가 국무부에 전문을 보냈다. “장모의 병세가 위중하다. 병문안을 허락해 주기 바란다.” LA공항에 도착한 대사는 키신저가 보낸 헬기를 타고 키신저의 사저로 갔다. 엄청난 말을 들었다.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할 계획이다. 사이공, 방콕, 뉴델리, 이슬라마바드를 거쳐 파리로 간다. 파키스탄에 도착하면 야히아 칸 대통령의 초청으로 산간휴양지에서 주말을 보내는 것이 원래 일정이나 이슬라마바드에서 중국에 가야 한다. 세부사항은 파키스탄에 돌아가 야히아 칸 대통령과 상의해라.”

5월 17일,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베이징 주재 파키스탄 대사가 보낸, 서명 없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닉슨 대통령은 양국관계의 정상화를 위해, 중국을 방문해 달라는 저우 총리의 제안에 동의했다. 6월 15일 이후 안보보좌관 키신저를 파견하려 한다. 모든 연락은 야히아 칸 한 사람으로 국한시킨다. 닉슨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은 저우언라이 총리와 키신저의 비밀회담 후 빠른 시간 내에 공포키로 한다.”

파키스탄 주재 미 대사 밀명 받아

장원진(오른쪽 첫째) 부부는 키신저와 친분이 두터웠다. 왼쪽 첫째는 탕원셩을 발탁한 지자오주(冀朝鑄). 장이 주미대사 시절 주영대사와 유엔 사무차장을 역임했다. [사진 김명호]

장원진(오른쪽 첫째) 부부는 키신저와 친분이 두터웠다. 왼쪽 첫째는 탕원셩을 발탁한 지자오주(冀朝鑄). 장이 주미대사 시절 주영대사와 유엔 사무차장을 역임했다. [사진 김명호]

6월 2일, 키신저는 워싱턴 주재 파키스탄 대사로부터 “중국도 키신저의 방문에 동의한다”는 서신을 받았다. “마오쩌둥 주석은 닉슨 대통령의 중국방문 환영을 언급한 적이 있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키신저 박사가 중국에 와서 고급관원들과 예비성 비밀회의 갖기를 희망한다. 중국에는 외부에 개방하지 않은 비행장이 많다. 파키스탄 비행기를 이용해도 되고, 우리가 이슬라마바드로 비행기를 파견해도 된다.” 마오가 닉슨을 만나고 싶어했다는 내용은 틀린 말이 아니다. 8개월 전 중국을 방문한 에드거 스노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닉슨 당선을 환영하는 사람이다. 사기성이 있지만 적은 편이기 때문이다. 베이징에 한 번 오라고 해라. 비행기 한 대만 있으면 될 일이다. 우리가 공표 안 하고 미국이 시치미 떼면 알 사람이 없다. 만나서 대화를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 말씨름 나눠도 좋고 안 나눠도 그만이다. 편한 마음으로 여행 삼아 오라고 해라. 닉슨은 철저한 반공주의자다. 그래서 만나고 싶다. 좌파나 중간파 따위는 만나고 싶지 않다.”

중국이 보낸 편지를 읽은 닉슨과 키신저는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중국에 제안했다. “7월 9일 베이징에 도착해 11일 중국을 떠난다. 체류 기간은 48시간이다.” 저우언라이는 키신저 접대조(接待組)를 꾸렸다. 장원진(章文晉·장문진), 왕하이룽(王海容·왕해용), 탕원셩(唐聞生·당문생)과 의전관 탕룽빈(唐龍彬·당용빈) 등 4명을 선정했다.

마오쩌둥과 왕하이룽. 왕은 36세 때 중국 최초의 외교부 부부장을 지냈다. [사진 김명호]

마오쩌둥과 왕하이룽. 왕은 36세 때 중국 최초의 외교부 부부장을 지냈다. [사진 김명호]

조장 장원진은 저우언라이가 직접 배양한 외교관이었다. 14세 때 북양 정부 국무총리였던 외조부의 권고로 독일 유학을 떠났다. 친가도 명문이었다. 조부는 대과(大科)에 급제한 역사가이며 교육자였다. 어릴 때부터 조부에게 “금전과 지위는 허망하다. 실력이 제일이다. 돈을 명예로 아는 사람들과는 상종하지 말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16세 되던 해 봄, 베를린 교외의 공원에서 부친의 친구 저우언라이를 만나 인연을 맺었다. 언어학에 심취해 유럽의 도서관과 고서점 순례하던 중 모친의 권고로 귀국했다. 칭화대학을 마친 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제 발로 충칭(重慶)에 있던 중공 남방국을 찾아갔다. 남방국을 이끌던 저우언라이는 외국어에 능한 장을 일찌감치 외교관감으로 낙점했다. 마셜 원수와의 회담 통역도 장에게 맡겨야 마음이 놓였다.

왕하이룽은 마오쩌둥의 외가 쪽 조카였다. 마오의 70세 생일날 할아버지 따라 생일잔치에 갔다가 주석을 처음 만났다. 마오는 어린 왕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있는 중난하이(中南海)는 네게 문이 활짝 열려있다. 마음대로 출입해라. 너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공 계통을 선호하던 왕은 마오가 권하는 베이징 외국어학원에 응시해 낙방했다. 마오가 방법을 일러줬다. “쉬운 영어책 한 권 들고 무조건 암기해라.” 이듬해 합격하자 마오의 칭찬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졸업하면 외교부에 가라.” 마오는 약속을 지켰다. 왕하이룽은 외교부의 왕(王)이었다. 저우언라이가 왕을 파키스탄에 파견한 이유도 직접 보고 마오에게 직보하라는 의미였다.

탕원셩은 중국의 유엔 가입 후, 유엔 사무차장을 역임한 탕밍자오(唐明照·당명조)와 왕년의 옌칭(燕京)대학 퀸카 장시셴(張希先·장희선)의 딸이었다. 1943년 봄, 브루클린의 산부인과에서 태어나 맨해튼의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안락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한반도에 전쟁이 터지고 매카시 광풍(狂風)이 뒤를 이었다. 중공과 선이 닿아있던 탕밍자오는 언제 FBI가 들이닥칠지 불안에 떨었다. 급히 돌아오라는 저우언라이 편지를 받고 귀국했다. 조국에 온 탕원셩은 입학 시기를 놓쳤다. 저우가 마련해준 지금의 중국인민대외우호협회에 살며, 눈만 뜨면 위층에 있는 도서 열람실로 올라갔다. 열람실에는 미국인들이 버리고 간 영문서적이 널려있었다. 초등학교와 베이징 사대부중을 마친 탕원셩은 베이징 외국어학원에 진학했다. 교수들은 수업시간마다 탕원셩의 눈치를 봤다. 평소 저우는 외교관 후보 물색하느라 눈에 불을 켰다. 외교관 시험이 없던 중국의 외교관은 외국어 실력이 최우선이었다. 탕원셩을 놓칠 리 없었다. 졸업과 동시에 외교부에 자리를 마련했다.

비밀 지키려고 기자들 눈 따돌려

키신저의 비밀방문 7개월 후 중국을 방문한 닉슨은 상하이에서 휴식을 취하고 베이징으로 향했다. 닉슨과 악수하는 시장 뒤가 상하이까지 영접 나온 탕원셩. [사진 김명호]

키신저의 비밀방문 7개월 후 중국을 방문한 닉슨은 상하이에서 휴식을 취하고 베이징으로 향했다. 닉슨과 악수하는 시장 뒤가 상하이까지 영접 나온 탕원셩. [사진 김명호]

7월 1일 밤, 키신저가 탄 항공기가 워싱턴의 앤드류스 공군기지를 이륙했다.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하기까지 사이공과 방콕, 뉴델리를 경유하며 대단치 않은 일정으로 기자들을 지루하게 만들었다. 산간지역에서 열기로 한 야히아 칸과의 회담은 파키스탄과 철천지원수인 인도를 의식해 거절했다. 대신 꾀병을 앓기로 했다. 이것도 미국 대사관 의사에게 들통날 우려가 있었다. 보안상 해외로 출장 보냈다.

야히아 칸은 미·중 양국과 유대를 강화할 좋은 기회였다. 7월 7일 오후, 키신저 접대조를 파키스탄까지 이동시킬 보잉 707 한 대를 베이징 난위안 공항에 파견했다. 8일 새벽, 저우언라이가 엄선하고 마오쩌둥이 비준한 4명의 접대조가파키스탄행 비행기에 올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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