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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경호의 시선

2022년 임인년, 범 내려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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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경제·산업디렉터

서경호 경제·산업디렉터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2022년 ‘검은 호랑이의 해’ 임인년(壬寅年)의 한국 경제에, 범 내려온다. 이날치의 노래처럼 ‘새 낫 같은 발톱을 세우고’ 다가오는 무시무시한 짐승을 떠올리며 내년 한국 경제의 위험 요인을 정리해봤다.

우선, 선거다. 내년에 대선과 지방선거가 몰려 있다. 이미 유력한 여야 대선 후보들이 경쟁하며 표심을 노리는 포퓰리즘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코로나 방역 강화로 연말 대목을 날리게 된 자영업자들을 지원해야 하지만, 어떤 원칙과 기준으로 이들을 지원할 것인지 대책도 마련하지 않고 50조원, 100조원부터 거론하는 게 바로 포퓰리즘이다. 표 얻는 데 도움만 된다면 뭐라도 한다. 보수도, 진보도 부끄러움이 없다. 보수는 노조의 마음을 사기 위해 공공기관 노동이사제에 찬성했다. 진보는 분노의 표심을 피하려는 임기응변으로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되돌리려 안간힘을 쓴다. 그게 정책 혼선을 더 키우고 있다.

선거 포퓰리즘과 예측불가능성
새해 경제에 위험요인 될 수도
전문가들 “올해만큼 성장 어려워”

포퓰리즘의 진수는 요즘 터키가 잘 보여준다.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물가를 잡기 위해 외려 금리를 잇달아 내리는 청개구리 통화정책을 펴고 있다. 고금리가 고물가를 부른다는 황당한 논리의 이면엔 금리 인하로 경기를 부양해 장기집권을 노리는 정치욕이 똬리를 틀고 있다. 글로벌 흐름과 따로 노는 통화정책을 압박하기 위해 금리 인하에 반대하는 중앙은행 총재를 세 명이나 물갈이했다. 그 결과는 터키 리라화의 대폭락이다. 금리는 내리고 통화가치는 떨어지니, 생활물가는 오르고 터키 국민의 삶만 고단해졌다. 정치 논리로 경제를 재단하면 터키처럼 된다. 우리에게도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될 것이다.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무너뜨리는 건 또 다른 범이다. 정부가 최근 발표한 ‘2022년 경제정책 방향’ 자료를 보려고 기획재정부 홈페이지에 들렀다가 같은 날 나온 ‘문재인 정부 경제 분야 36대 성과’라는 무려 233쪽의 묵직한 파일을 봤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성장과 분배’ ‘혁신과 포용’ 등 경제정책의 다방면에 걸쳐 ‘두 마리 토끼’를 잡았고, 거시경제·혁신성장·포용성장·구조전환 4대 분야에서 36대 성과를 이뤄냈다는 게 골자다.

인내심을 갖고 읽어 내려가다 36대 성과 중에 일곱 번째로 ‘재정건전성 유지’를 꼽은 걸 보고 파일을 닫아버렸다. 자화자찬이 보기 불편했다.

물론 과거에도 정부가 막바지에 경제 성과를 포장하는 통계 숫자를 나열하고는 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차라리 선배 관료들이 허리띠를 바짝 조여 둔 덕분에 코로나 위기를 타개하는 데 재정이 버팀목이 됐다고 감사의 인사라도 한 줄 적는 게 더 나았겠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새해 경제 전망을 하면서 중장기적으로 구조적 재정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채무의 가파른 증가세를 적극적으로 통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지속가능한 재정운용에 대한 신뢰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비판도 했다. 오죽하면 국책 연구기관이 이런 쓴소리를 할까. KDI는 “국가채무의 급격한 증가 속도를 통제하기 위해 사회적 합의에 바탕을 둔 구속력 있는(binding) 재정준칙을 마련하고 이를 법제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또 다른 범은 예측불가능성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최신호는 코로나19 대유행이 남긴 유산이 ‘예측가능한 예측불가능성(predictable unpredictability)’의 시대라고 표현했다. 말장난 같지만 실제가 그렇다. 이코노미스트의 새해 전망도 벌써 일부 빗나갈 조짐이다. 백신이 더 개발되면서 코로나가 일부 후진국에만 영향을 미치는 풍토병으로 바뀐다고 했는데, 요즘 선진국에서 재유행하고 있다.

국내외 기관들의 내년 한국 경제 전망을 보면, 한마디로 올해만큼 성장하기 힘들다는 게 컨센서스다. 정부(3.1%)가 가장 낙관적이고, 한국은행과 KDI·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3.0%, LG경제연구원과 현대경제연구원은 2.8%로 전망했다. 세계 경제성장률도 올해보다 내년이 떨어질 것인 만큼, 수출에 기대는 소규모 개방 경제인 우리라고 별 수는 없다. 올해 성장률이 예상보다 높았던 데 따른 기저효과도 있을 테니 너무 주눅이 들 필요는 없지만 곳곳에 암초가 보인다.

미국이 내년 통화정책을 정상화하겠지만 개도국에 큰 충격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국내외 연구기관의 전망이긴 하다. 하지만 국제금융시장의 향방은 우리의 의지나 노력과 상관없이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코로나 대응 과정에서 개도국의 재정건전성도 나라마다 달라졌다. 만사 불여튼튼이다. 나라도, 개인도, 안전벨트를 잘 매고 대비하자. 범 내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