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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아이들 법정 서나…헌재 "영상진술 증거인정 위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유남석 헌법재판소장과 재판관들이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자리하고 있다.[뉴시스]

유남석 헌법재판소장과 재판관들이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자리하고 있다.[뉴시스]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의 영상녹화 진술을 곧바로 증거로 인정하는 성폭력처벌법 조항에 대해 위헌이 선고됐다. 이에 보완 입법이 이뤄질 때까지 성폭력 피해 아동이 2차 가해 우려에도 불구하고 법정에 서야 하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게 됐다.

헌법재판소는 23일 미성년 피해자의 영상녹화진술을 증거로 인정하는 성폭력범죄처벌특례법 제30조 6항에 대해 “피고인의 방어권을 침해한다”며 재판관 6대 3의 의견으로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위헌 선고된 조항은 19세 미만 성폭력 범죄 피해자의 진술이 담긴 영상물은 조사 때 동석한 신뢰관계인이나 진술조력인의 진술에 의해 내용이 진정하다고 인정되면 피해자 직접 신문 없이 증거로 채택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이다.

아동 성폭력으로 징역 6년…유죄 증거되자 헌법소원

이번 위헌 소송 청구인인 A씨는 위력으로 13세 미만의 아동을 수차례 추행했다는 등의 범죄 사실로 2018년 대법원에서 징역 6년형을 확정받았다. 1·2심에서 피해 아동의 영상녹화 진술이 법정에 제출됐다. A씨 측은 이 증거에 동의하지 않았다. 법원은 피해자 조사에 동석한 신뢰관계인들에 대한 증인신문을 거쳐 아동에 대한 직접 신문 없이 이를 유죄의 증거로 사용했다.

A씨는 “미성년 피해자에 대한 반대 신문권을 전혀 행사하지 못했음에도 법원이 피해자 진술의 증거능력을 인정해 유죄판결의 결정적 증거로 사용했다”며 헌법소원을 냈다.

위헌 의견을 낸 6명의 재판관은 해당 조항이 피고인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성폭력 사건은 그 특수성으로 인해 피해자의 진술이 사건의 핵심 증거인 경우가 많다. 무죄를 다투는 피고인 입장에서는 이 진술을 탄핵해야 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반대 신문권이 보장되지 않고, 대체할 방안도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피고인은 사건의 핵심적 진술증거를 충분히 탄핵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있으므로 피고인의 방어권 제한 정도는 매우 중대하다”고 했다.

다수 재판관들은 또 법정 의견을 통해 미성년 피해자 증인 신문에 따른 2차 피해 우려에 대해선 다양한 방법을 통해 방지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수사 초기 증거보전절차를 적극적으로 실시해 공판 단계에서의 증인 소환을 최소화하고 ▶증인지원제도를 통해 비공개 심리를 하거나 비디오 중계를 통한 증인 신문 등의 방법을 제시했다.

헌재는 “피고인의 반대 신문권을 보장하면서 미성년 피해자를 보호할 조화로운 방법을 상정할 수 있다”며 “피해자에 대한 반대 신문권 행사 자체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미성년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은 그 재판 결과를 피고인에게 설득할 수도 없고 실체적 진실의 발견도 위협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미성년 피해자 2차 피해 우려 훨씬 커…3인 반대의견

이선애, 이영진, 이미선 재판관은 반대의견을 냈다. 성폭력 범죄에서 미성년 피해자를 특별히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취지다. 3명의 재판관은 “법정에서 성폭력 피해를 복기하고 격렬한 탄핵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범죄행위만큼이나 피해자에게 강한 정신적 충격과 모멸감을 준다”며 “특히 반대신문이 피해자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미성년 피해자의 경우 성년 피해자보다 법정 진술로 입을 2차 피해 우려가 큰 반면 실체적 진실 발견에 대한 기여는 적을 수 있다”고 꼬집었다.

아동의 특성이나 성폭력범죄에 대한 전문성 없는 신문에 의해 지엽적인 사안에 대한 집요하고 날 선 공격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고 피고인이 가족 등 피해자와 가까운 관계일 경우 미성년 피해자가 느낄 2차 피해 정도가 훨씬 커질 수 있다고도 했다.

아동 피해자 법정 선 일 없었는 데…앞으로 성폭력 재판은

이날 헌재 결정은 미성년자가 피해자인 성폭력 재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아동 성폭력 사건의 경우 신고 초기 해바라기센터 등에서 신뢰관계자와 동석해 아이에게 장난감을 주거나 분위기를 편안하게 하는 등의 방법을 동원해 진술을 받고, 이 과정을 영상으로 녹화해 법정에 제출하는게 통상의 절차다.

수도권 법원에서 성폭력 사건을 전담하는 한 판사는 “현재 법원 실무상 아동이 피해자인 성폭력 사건에서 대부분 영상녹화물을 증거로 채택하지 직접 법정에 아동을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날 헌재 결정으로 미성년자 진술 영상녹화물을 증거로 쓰지 못하게 되면서 앞으로는 피해 아동·청소년이 수사기관뿐 아니라 1·2심 법정에서 수차례 피해를 진술해야 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피해 아동 진술의 신빙성은 성인 진술의 신빙성보다 쉽게 흔들릴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다른 판사는 “아이의 어렸을 때 기억, 재판과정에서 시간이 흐른 다소 흐른 경우라면 진술 신빙성에 트집을 잡을 여지는 훨씬 커진다”고 했다. 아이 진술을 믿지 못해 아동 성폭력 피해에 무죄 판결이 나는 경우가 많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번 위헌 결정이 이미 형을 확정받고 복역 중인 A씨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A씨 범죄에 대한 처벌 조항 자체가 없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A씨 청구를 대리한 장윤기 변호사는 “A씨가 현재 복역 중이어서 결정문을 확인한 뒤 가족들과 논의해 향후 대응 방향을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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