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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하나 됨’의 조건 , 질서와 예측 가능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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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쿵짝 쿵짝 쿵짜짜 쿵짝 네박자 속에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눈물도 있네.’ 송대관의 노래 한 구절이다. ‘한 구절 한고비 꺾어 넘을 때 우리네 사연을 담는 울고 웃는 인생사, 연극 같은 세상사.’ 이렇게 우리네 애환을 담아 노래한 것이 트로트고 트로트는 ‘쿵짝 쿵짝’ 이렇게 4박자(사실은 조금 느린 2박자다)에 얹힌 노래다. 그래서 (삼단논법에 의하면) ‘세상사 모두가 네박자 쿵짝’이다. 네박자, 즉 4/4박자는 보통률이라 할 만큼 가장 보편적인 박자이기에 옛 작곡가들은 이를 4/4가 아니라 C(common)로 표기했다.

다른 힘 하나로 묶는 노동요처럼
지도자가 국민을 하나로 묶을 때
안정성·역동성 겸비한 사회이뤄

‘음악적 시간을 구성하는 기본적 단위’라는 박자(拍子)가 무엇인지 좀 쉽게 풀어보자. 손뼉을 치며 노래할 때 ‘손뼉 한 번=두 박’이다. 양손을 마주치는 순간이 강박(쿵)이고 양손을 벌리는 순간이 약박(짝)이다. 흥이 넘쳐난다면 강박에 어깨를 들썩이고 약박에 손뼉을 칠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노래의 리듬이 제아무리 복잡해 보았자 그것은 이렇게 같은 길이를 지닌 박(拍)을 쪼개거나 묶은 것일 뿐, 음악에 있어 셈의 기본단위인 박의 길이와 그것이 모여 형성한 강약 구조는 대체로 노래가 끝날 때까지 변치 않는다. 박의 길이는 그 노래의 빠르기(tempo)를 결정하고, 박이 모여 형성한 강약의 주기는 박자라는 질서를 형성한다. 강박이 두 번 만에 회귀하면 2박자, 세 번 만에 회귀하면 3박자, 네 번 만에 회귀하면 4박자… 이렇게.

이 단순한 질서의 첫째 효용은 예측 가능성에 기반한 ‘하나 되기’다. 우리 민요 중에는 노동요(勞動謠)가 제법 많다. ‘일을 즐겁게 하고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여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하여 부르는 노래’라지만, ‘능률을 높이기 위하여’라는 구체적 목적에 비하여 ‘즐겁게 하고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여’라는 방법론은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덜커덩 소리 나는 방아이지만, 하찮은 밥이라도 지을 수 있어 다행이니, 시부모님 먼저 차려 드리고 남는 것 있거든 내가 먹으리.’ 고려 속요 ‘상저가(相杵歌)’의 노랫말이다. 효(孝)의 가치를 폄훼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이 노래를 부르는 며느리의 심정이 즐거울 리 있었을까. 강요된 희생에 눈물 마를 날이 없지는 않았을까. 그런데도 이 방아타령을 부른 것은 절구통에 둘러선 아낙네들이 호흡을 맞추기 위함이다. 타작할 때, 그물을 걷어 올릴 때, 길쌈할 때, 써레질할 때, 이렇게 노동의 형태에 따라 그에 걸맞은 장단이 있기 마련이고 노동의 고단함을 달랠 노랫말을 그에 얹은 것이 노동요다. 장단에 맞추어 하나 될 때 힘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는 사실은 줄다리기 한 번만 해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각자 체력과 생각이 다른 개개인이 호흡을 맞추려면 템포와 강약을  일치시켜야 한다. 한마디로 ‘질서에 기반한 예측 가능성’을 제공해야 한다.

둘째 효용은 안정된 질서가 부여하는 편안함이다. 우리의 게으른(?) 뇌는 이미 파악한 질서에 더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정보를 처리하고자 애쓸 필요도 없고 일은 질서에 기반한 예측대로 진행되니 더할 나위 없이 편하다. 그런데 이 안정감이 지나치면 지루해진다. 생동감이 사라진다. 그래서 작곡가들은 때로 질서로부터의 일시적·부분적 일탈을 감행한다. 점점 빠르게, 점점 느리게 등의 일시적인 빠르기 변화, 늘임표, 당김음, 약박에 놓인 강세 등 분명한 목적 하에 규칙성을 해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그 일탈은 질서로의 회귀를 전제로 한다. 질서를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체된 상태에 역동성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때로 빠르기나 박자를 바꾸어 새로운 부분을 형성하기도 하지만 전후 맥락상 납득할 수 없는 일은 절대로 저지르지 않는다. 그래서 일탈이 계속되거나 방향을 잃은 음악은 단 한 곡도 없다. 아니 실제로는 아주 많았겠지만, 무대에 오르지 못하고 쓰레기통에 처박혔을 터이니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런 음악을 들어볼 기회가 아예 없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역동적인 한국’(Dynamic Korea)을 거쳐 ‘K-??’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정작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는 예측 가능성에 기반하여 안정성과 역동성을 겸비한 사회다. 지휘자는 포디엄에 오르기 전에 음표 이면의 실체를 파악하고 30cm 남짓한 작은 막대기와 몸짓만으로 그 복잡한 질서를 멋지게 구현해야 한다. 포디엄은 지휘자가 자신의 음악적 이상을 구현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의 책무는 ‘악보에 충실할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템포를 뒤흔들고 박자까지 바꾸고 싶다면 애먼 연주자와 청중 괴롭힐 것 없이 스스로 작곡가를 자처하면 될 일이다. 물론 그 악보는 쓰레기통을 향하게 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