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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탈원전에서 탈금융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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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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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떼’ 같은 이야기지만 상당수 중장년층에겐 경월 소주의 추억이 있다. 대학 때 경춘선 열차를 타고 학과·동아리 야유회나 엠티(MT)를 가면 진로 소주를 살 수 없었다. 마을 상점에 놓인 것은 경월 소주뿐이었다. 부어라 마셔라의 밤이 지나면 1.8L 경월 됫병들과 숙취에 전 청춘들이 민박집에 널브러져 있었다.

마실 때부터 술이 쓰다는 말이 많았다. 소주가 쓴 것은 지극히 당연한데도 코를 찡그리며 한마디씩 했다. 실제로 평소 마시던 진로 소주보다 알코올 향이 강한 것 같기도 했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뒤집어진 것은 다 경월 탓이었다. 무슨 소주였든 그렇게 부어 넣으면 탈이 안 날 수 없을 테지만 삭제하고 싶은 주취 만행의 근원으로 삼을 희생양이 필요했다.

50년 전 생긴 ‘소주 카르텔’ 같은
경제 논리 무시한 관치금융 등장
무리한 정책은 시장의 역습 초래

그 시절 청춘들은 실생활로 ‘소주 카르텔’의 존재를 깨달았다. 서울로 진학해 지방에서 올라오면 아버지 술상에 있던 금복주·대선·보해 소주를 술집에서 볼 수 없었다. “소주 주세요”와 “두꺼비 주세요”가 동의어였다. 서울 학생들은 탈수도권 여행을 하며 소주=진로 공식이 진리가 아님을 알게 됐다.

1965년에 혁명정부는 ‘1도(道) 1소주’ 원칙을 세웠다. 각 광역지자체에 소주 회사를 하나만 둔다는 것이었다. 레시피도 통일했다. 국가가 나눠주는 주정에 물과 감미료를 넣는 게 공정의 전부였다. 사실상 술 배급제였다. 250여 개의 소주 회사 중 10개만 살아남았다. 간택된 회사는 재벌급으로 컸다. 선택받지 못한 회사는 망했다. 전남에서 인기가 있던 삼학 소주도 그중 하나였다. 야당 정치인 김대중을 돕는다는 의심 때문에 일찌감치 제외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카르텔에 의한 소주 배급제는 나쁜 음주 문화를 만들었다. 한 모금씩 향을 느끼며 마시는 주법이 사라졌다. 감자 등에서 뽑은 알코올에 물과 인공 감미료를 넣은 것이니 음미가 의미 없었다. 소주는 확 털어 넣고 빨리 취하는 데 최적화된 술이었다. 서구와 중국에서는 음식을 더욱 맛있게 먹기 위해 술을 곁들이는데, 우리는 술의 쓴맛을 지우기 위해 음식(안주)을 먹는다.

막걸리에도 유사한 카르텔 구조가 생겼고, 제조 방법도 획일화됐다. 전통주는 밀주(密酒)로 명맥을 유지하거나 조용히 사라졌다. 위스키와 맥주의 수입은 아예 금지됐다. 위스키 성분이 전혀 없는 최백호의 노래에 등장하는 ‘도라지 위스키’라는 게 나왔다. 진짜 위스키는 미군부대에서 유출된 것을 남대문 도깨비시장에서 몰래 사거나 해외 출장자로부터 선물받지 않으면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1979년 10월의 박정희 대통령 서거 현장에 영국 위스키 시바스 리갈이 있었다는 것에 많은 국민이 놀랐다. 주류 카르텔의 독점적 시장 지배구조는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이런 30년 ‘관치’의 영향으로 한국에서 술 제조 분야가 지금도 개발도상 사업에 머물러 있다.

21세기의, 세계 ‘톱 텐(10)’에 들었다고 대통령이 자랑하는 나라에서 술이 아니라 대출금을 배급하는 제도가 생겨날 판이다. 정부가 고신용자 대출 총량을 각 은행에 정해 주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중·저신용자 대출 몫을 늘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신용도가 높아서 대출을 받지 못하는 황당하고 억울한 사례가 속출할 수 있다.

정부 개입 때문에 이미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신용대출 금리보다 높아지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제2 금융권 이자율이 제1 금융권 이자율보다 낮은 경우도 생겼다. 일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다. 이렇게 경제와 금융의 논리를 초월한 ‘탈금융’ 시대가 열렸다. 탈원전에 이은 또 하나의 트렌드다. 은행은 정부가 정한 고이율이 가져다주는 이득을 알뜰히 즐기면 된다. 독점적 카르텔 안에서 편하게 돈을 벌었던 소주 회사들처럼.

경쟁력이 떨어진 은행들이 언젠가 시장의 역풍을 맞고 휘청이겠지만, 금융계와 관료 사회는 모두 ‘아몰랑’이다. 탈원전에 반대한 이들이 어떻게 됐는지 그들은 너무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