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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의 영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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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조현숙 기자 중앙일보 기자
조현숙 경제정책팀 차장

조현숙 경제정책팀 차장

든 것 없이 의욕만 넘치던 햇병아리 기자 시절. 기획예산처(현 기획재정부) 국장과 차 한잔하며 마주 앉을 기회가 있었다. 역시나 경험도 없고 예의도 모르던 때라 면전에 대고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더라” 소리를 해댔다.

어린 기자의 발칙한 질문에 화가 날 만한 데도 그 국장은 웃으며 여유 있게 답했다. “맞다. 영혼이 없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는 설명을 이어갔다. “공무원은 컴퓨터 같은 하드웨어라고 보면 된다. 정권이 바뀌면 하드웨어는 그대로지만 소프트웨어가 바뀌는 거다. 어떤 요구가 있어도 훌륭하게 수행해내는 고성능 컴퓨터 역할을 해내는 게 공무원이 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무원이 영혼이 없다는 말이 맞다.”

우문현답이란 말은 이런 때 쓰는 거겠다. 막힘 없이 현답을 해냈던 그 국장은 정무직에도 오르고 공기업 사장도 하고 이후에도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의 대답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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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란 하드웨어가 곧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맞는다. 디데이(D day)는 내년 3월 대통령 선거다. 불과 넉 달도 채 안 남았다. 그런데 공무원 조직은 조용하기만 하다. 멈춰있는 거대한 컴퓨터, 그 자체다.

대권 주자 입에서 하루가 멀다고 50조원, 100조원 공약이 쏟아져 나오지만 재정 당국 반응은 ‘그러든지 말든지’다. 여야 후보 모두 경쟁적으로 나랏돈을 더 퍼주겠다고 하는 터라 공무원 중립 의무 위반 걱정도 할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종합부동산세와 양도소득세 강화 방침을 뒤집겠다는 양당 주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이 “다주택자 양도세 완화 추진 계획이 없다”고 말한 지 채 2주도 지나지 않아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1년 유예하겠다”는 정반대 발표를 했다. 정치권에서 지르고, 당국에서 반대했다 백기 들고. 수년 여 반복된 학습효과는 컸다.

법학과 역사, 사회학, 신학을 아우르는 프랑스 석학 자끄 엘륄(1912~94)은  『정치적 착각』에서 정권을 잡은 정치인(한국으로 치면 대통령)을 이렇게 정의 내렸다. “진정으로 자신이 하지 않은 결정과 행동, 알지 못하거나 몇 개밖에 모르는 결정과 행동에 책임지기 위해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엘륄은 이어 “그가 의회나 공식 연설에서 한 모든 것, 그가 서명한 모든 문서는 관료로부터 나온다”고 통찰했다.

대통령이 바뀌는 거지 공직사회 전체가 바뀌는 게 아니다. 결국 일은 관료가 한다. 집단 무력증에서 공직사회를 건져내는 데 관심을 가진 후보는 보이지 않는다. 결국 5년 후 책임은 자기 몫인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