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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박물관 잔혹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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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백일현 기자 중앙일보 기자
백일현 산업1팀 기자

백일현 산업1팀 기자

“한국은 전쟁 폐허에서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지만 경제성장을 이끈 대표 산업을 조명하는 산업박물관이 없다. 서울시와 상공회의소, 중앙정부와 기업이 함께 산업박물관을 만들자.”

대한상공회의소 위원장단은 13일 오세훈 서울시장을 만나 이렇게 제안했다. 하지만 서울시 입장은 요약하면 이러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할 산업박물관이 없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정부가 주도할 수밖에 없다. 정부와 산업계에서 이야기가 정리되면 서울시도 협조하겠다.”

이런 미적지근한 반응이 나온 이유는 있다. 산업박물관 건립을 둘러싼 실패의 역사 때문이다.

김회룡기자

김회룡기자

8년여 전 정부가 ‘국립산업기술박물관’을 만들겠다고 나선 적이 있었다. 애초엔 1조원 넘게 들여 서울 용산 20만㎡ 부지에 세우겠다는 구상이었다. 연간 관람객 300만 명이 찾아 경제적 효과가 11조원에 이를 것이란 연구 결과도 나왔다. 하지만 2013년 9월, 박물관 부지는 서울이 아닌 울산으로 정해졌다. “대한민국 근대화를 앞당긴 산업화의 상징도시가 울산”이란 이유에서다. 시민 30만 명 서명을 받는 등 지역사회 열망이 컸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울산 대선 공약이기도 했다. 울산시는 건립부지도 정했다. 진척이 잘 됐다면 건물은 2020년 완공됐을 것이다. 그러나 수차례 예비타당성 조사를 거치면서 예산과 규모가 거듭 축소됐다. 끝내는 건립이 물거품이 됐다. 울산은 포기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산업박물관이 언제 현실화될지는 요원하다.

그사이 아쉬운 대로 작은 박물관들은 생겼다. 서울시가 60년 구로공단 역사를 기념하겠다며 ‘국내 최초 산업박물관’이라고 명명한 ‘G밸리산업박물관’이 지난달 문을 열었다. 삼성전자·현대차·롯데제과 등 일부 기업도 자사 박물관을 운영중이다.

하지만 대중적 관심은 끌지 못하고 있다.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전세계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로 꼽히는 미국 헨리 포드 박물관 같은 곳이 되려면 한참 멀었다.

상황이 꼬이면 기본 전제부터 돌아보는 게 맞다. 대한민국은 왜 그 오랜 세월 그럴듯한 산업박물관 하나 짓지 못했을까. 지역 정치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지자체와 정부가 함께 만들어야 한다는 기본 설정에 문제는 없었을까. 연말이면 대기업은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라며 각종 사회 공헌 사업을 벌였다고 자화자찬성 자료를 쏟아낸다. 그렇게 많은 공익사업을 하는데 왜 괜찮은 산업박물관은 못 만들까. 다시 한번 자문하게 된다. 박물관 수준이 곧 그 나라 문화 수준이란 말이 있다. 한국은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