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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4억 수거책에 "피고도 피해자"…판사 말에 울분 터뜨린 유족 [목소리 사기, 7000억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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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님이 피고인도 피해자라고 하더라고요. 손발이 떨리고 온몸이 얼어버렸어요.”
지난해 10월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은 뒤 1200만원을 잃고 극단 선택을 한 고(故) 임모(40대·남)씨 유가족의 울분이다. 유가족들은 피해자에게 돈을 받아 총 책임자에게 전달하는 중간 단계 역할을 한 전달책 A씨의 1심 재판에서 귀를 의심했다. 판사가 피고인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임씨는 가족들과 매년 여름휴가를 갔던 강원도에서 극단 선택을 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뇌 검사가 필요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했다.

4억 전달했는데 몰랐다?…솜방망이 처벌 논란

보이스피싱 범죄에 대한 법원의 형량과 시선에 피해자와 유족들의 가슴은 멍들고 있다. 총책에 대한 처벌 뿐 아니라 중간책 처벌이 약하다는 비판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임씨의 유가족은 “전달책은 최소 20건 이상, 적어도 4억이 넘는 금액을 전달했다”며 “초범이라는 이유로 그 많은 건수와 금액을 전달할 때까지 (보이스피싱을) 몰랐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전달책이 없으면 피해자가 생기지 않는다. 총책이 아니라는 이유로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있는데, 엄벌을 내려야 한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보이스피싱 범죄는 형법상 사기 또는 사기방조죄, 전기통신금융사기죄 등이 주로 적용된다. 사기죄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이 법정형이다. 전달책 등 가담자들에게 주로 적용되는 사기 방조죄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이다. 가중처벌 요소로는 범죄단체 가입 및 활동할 경우 등이 있다.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수익금이 5억원 이상일 경우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징역형이 적용될 수 있다.

보이스피싱 범죄 1심 처벌 현황.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보이스피싱 범죄 1심 처벌 현황.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중국, 전화 500번 이상 발송 시 가중처벌  

최근 5년간 대법원 사법연감 자료에 따르면 ‘전기통신 금융사기 피해방지 및 피해금환급에 관한 특별법’으로 재판에 넘겨진 이들이 1심에서 벌금형 또는 집행유예를 받은 비율이 증가했다. 2016년 1심에서 유기징역을 받는 경우는 82%에 육박했으나, 2019년에는 35%대로 떨어졌다.

형사전문 허윤호 변호사(법률사무소 휘)는 “보이스피싱 수법이 진화하다 보니, 전달책도 합법인 줄 알고 시작했다가 연루되는 경우들이 꽤 있다”며 “애매한 상황들이 있다 보니 형량이 다양하게 나오는 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총책은 해외에 있어 잡기 어려운 경우가 많고, 전달책이 사전에 범죄를 인지하고 가담했는지를 입증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려운 지점들이 있다”고 설명했다. 재판 과정에서 진지한 반성이나 상당 금액을 공탁하는 경우, 동종 전과가 없을 때, 피고인의 나이와 건강상태 등이 감형의 사유가 되기도 한다. 피해 액수가 적고 참작 사유가 있으면 형량이 줄어드는 경우가 적지 않다.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의 울분을 고려했을 때, 중국의 양형 기준은 시사점이 있다. 중국은 5000번 이상 문자를 보내거나 500번 이상 전화한 것이 확인될 경우 가중처벌 대상이 된다. 불특정 다수에게 무차별적인 ‘테러’ 형태의 범죄는 죄질이 나쁘다고 보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중국처럼 문자 발송·전화 횟수에 따라 가중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선진 각국도 대책 마련에 고심 

여러 선진국도 보이스피싱 대책과 처벌에 고심하고 있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올해 발간한 ‘주요국의 피싱 사기 입법·정책 동향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보이스피싱 사기에 이용되는 개인신원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관련 법제를 정비해 왔다. 1998년 제정된 ‘신원사기·사칭방지법’은 불법 행위를 비롯해 특정 의도를 가지고 이름이나 여권번호 등 타인의 신원 확인 수단을 고의로 이전·이용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위반하면 징역이나 금고형에 처하며 신원 확인 수단을 위법 사용해 얻은 재산은 정부가 몰수한다.

보이스피싱을 형법상 사기죄로 처벌하는 일본은 2005년부터 총무성 주관으로 ‘피싱대책협의회’를 구성해 범정부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최신 피해 유형을 고지해 국민이 보이스피싱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고 고령층을 대상으로 피싱 사기 예방 대책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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