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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눈엔 내가 홍합으로 보이지? 너희가 섭을 아느냐[백종원의사계MDI]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네 눈엔 내가 홍합으로 보이지?
너희가 섭을 아느냐

'백종원의 사계' 섭. 인터넷 캡처

'백종원의 사계' 섭. 인터넷 캡처

‘백종원의 사계 MDI’는 티빙(Tving) 오리지날 콘텐트인 ‘백종원의 사계’ 제작진이 방송에서 못다 한 상세한 이야기(MDI·More Detailed Information)를 풀어놓는 연재물입니다.

사실 너무나 친숙하면서도 잘 모르는 것이 홍합의 세계다. 찬바람이 불 때, 인심 좋은 포장마차에 자리를 잡으면 기본 안주로 뜨거운 홍합탕 한 사발을 내주곤 했다. 호로록호로록 뜨거운 국물에 홍합 알맹이를 까 먹으며 소주 한잔. 별 재료 없이도 감칠맛 도는 국물을 내주는 홍합이야말로 진정한 서민의 조개라 불러 손색이 없다.

'백종원의 사계' 섭. 인터넷 캡처

'백종원의 사계' 섭. 인터넷 캡처

우리 조상들도 예전부터 홍합을 즐겨 먹었다. 속살이 붉은빛이 돌아서 홍합(紅蛤)이라 불렀고, 맑은 물속에 사는데 조개이면서 식물처럼 뿌리가 붙어 있다고 해서 담채(淡菜, 이것은 나중에 우리말 ‘담치’라는 이름으로 서서히 바뀐다)라고도 불렀다. 홍합 종류를 먹을 때 제일 먼저 제거해야 하는 이 뿌리는 진짜 뿌리가 아니고, 홍합 종류의 특징인, 다리 역할을 하는 족사(足絲)를 말한다. 중국에서는 여자에게 특히 좋은 조개라는 이유로 동해부인(東海夫人)이라 불렀다 한다. 물론 남자가 먹어도, 여자가 먹어도 좋은 게 홍합이다.

'백종원의 사계' 섭. 우리나라 각 지역의 사계절 풍광과 제철 식재료를 함께 소개하는 '백종원의 사계'는 티빙(Tving)에서 볼 수 있다. 인터넷 캡처

'백종원의 사계' 섭. 우리나라 각 지역의 사계절 풍광과 제철 식재료를 함께 소개하는 '백종원의 사계'는 티빙(Tving)에서 볼 수 있다. 인터넷 캡처

그런데 조금만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면 요즘 우리가 즐겨 먹는 홍합은 조선 시대에 우리가 먹던 그 홍합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만다. 현재 우리가 먹는 홍합의 정식 명칭은 지중해담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지중해 원산의 수중생물이다. 선박 기술의 발달로 원거리 이동이 가능해지면서 머나먼 유럽에서 배 바닥에 붙어 우리 해역에까지 이동해 왔고, 채 200년도 되지 않았는데 토종 홍합보다 훨씬 더 흔한 개체가 되었다. 그만치 강인한 적응력이 특징이다. 어느 곳에서든 붙을 곳만 있으면 자리 잡고 산다.

'백종원의 사계' 섭. 인터넷 캡처

'백종원의 사계' 섭. 인터넷 캡처

당연히 양식도 쉬워 싼값에 푸짐하게 먹을 수 있게 됐으니 찬바람 부는 철이면 이렇게 고마운 서민의 안줏거리가 없다. 아무렇게나 통째로 삶아도 진국이 나오고, 중국집에서는 짬뽕에 넣어 풍미를 돋군다. 일반적으로 유럽에서는 홍합찜 하면 벨기에 특산 요리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바닷가가 있는 지역이면 어디서나 즐겨 먹는다.

이렇게 착한 지중해담치를 외래종이라고 배척할 뜻은 전혀 없지만, 오늘의 주제는 이 지중해담치에게 이름까지 내주고 조용히 지내고 있는 토종 홍합이다. ‘홍합’, ‘섭’, ‘담치’는 모두 같은 뜻이지만 언젠가부터 홍합=지중해담치가 되어 버렸고, 국내산 토종 홍합은 귀하신 몸이 되어 구별을 위해 ‘섭’이라 불린다. 산출량이 적기 때문에 섭은 홍합보다는 훨씬 비싸고, 구하기도 쉽지 않다.

'백종원의 사계' 섭. 인터넷 캡처

'백종원의 사계' 섭. 인터넷 캡처

두 홍합은 얼핏 봐도 크기에서 확연히 차이가 난다. 윤곽은 비슷하지만 일반적으로섭이지중해담치보다 2~3배가량 크다. 또 지중해담치는 90% 이상이 양식이라 대부분 껍질이 매끈한 반면, 섭은 자연상태에서 바위에 붙어 자라기 때문에 각종 이물질이 붙어 거칠다. 살 맛도 섭은 단단하고 쫄깃한 반면, 지중해담치는 부드럽고 말랑하다. 이미 그 맛에 익숙한 요즘 소비자들은 섭을 접하면 ‘응? 무슨 홍합이 이렇게 질기지?’라고 놀랄 수도 있다.

하지만 백종원 대표에게는 이 섭 맛이 바로 추억의 맛. “어릴 때 대천해수욕장 같은 데 놀러 가면 먹을 게 별로 없었어. 아이스케키? 찐 옥수수? 뭐 그런 정도? 그리고 섭 구이 아저씨가 있었지.” 한쪽 어깨에는 섭 자루와 양념통을, 다른 한쪽에는 연탄불 화로를 든 밀짚모자 아저씨들이 바닷가를 돌며 “홍합 있어요. 양념구이 드세요”라고 외치고 다녔다는 것. 그래서 ‘백종원의 사계’ 제작진은 그때 그 양념구이 맛을 재현해 보기 위해 속초 바닷가에 다시 모였다.

'백종원의 사계' 섭. 인터넷 캡처

'백종원의 사계' 섭. 인터넷 캡처

'백종원의 사계' 섭. 인터넷 캡처

'백종원의 사계' 섭. 인터넷 캡처

재료는 속초 앞바다에서 올라온 싱싱한 섭. 연탄불 위에 석쇠가 깔리고, 섭이 올려졌다. 대부분의 조개류와 달리 섭은 갯벌 아닌 맑은 물속에 살기 때문에 해감이 필요 없다. 섭이 익어 입이 벌어지면 그 상태에서 집게로 속살을 들고 가위로 잘라 준다. 지금껏 흔히 먹던 지중해담치에 비해 속살이 굵고 쫄깃하기 때문에 잘라야 먹기 편하다. 잘게 자를수록 양념도 더 많이 묻기 때문에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사실 추억의 포인트는 양념장에 있다. 초장과 물엿, 마늘, 그리고 설탕만 있으면 준비 끝.

“집에서 구이를 하실 때, 대개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설탕을 덜 넣어서지. 양념장 만든 뒤 맛을 보고 ‘어우달어’ 하는 느낌이면 딱 된 거야.”

'백종원의 사계' 섭. 인터넷 캡처

'백종원의 사계' 섭. 인터넷 캡처

'백종원의 사계' 섭. 인터넷 캡처

'백종원의 사계' 섭. 인터넷 캡처

가위로 자른 섭 살 위로 양념장을 숟가락으로 살살 뿌리며 익기를 기다린다. 섭 국물이 양념장과 섞여 자글자글 끓더니 삽시간에 수분이 날아가고 양념이 섭 살에 착 붙으면 먹는 타이밍. 거죽이 살짝 탈락 말락 할 때를 놓치면 안 된다. 이쑤시개로 찍어(이건 또 그래야 제격이라고 한다) 입에 넣으면 크아 소리가 절로 나는 맛. 달착지근한 맛이 입에 짝 붙는 걸 보면 설탕이 많이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정답이란 걸 알 수 있다. 나도 모르게 소주병과 잔을 찾게 된다.

'백종원의 사계' 섭. 인터넷 캡처

'백종원의 사계' 섭. 인터넷 캡처

“어때? 기가 막하지? 술을 부르지?”
“그런데 추억의 맛이라면서요. 초딩 때 소주랑 드시진 않았을 거 아니에요.”
“그러네. 그땐 뭐랑 먹었지?”

섭이 커서 석쇠에는 한 번에 네 개 이상 구울 수 없다. 섭 구이 한입에 소주 한잔, 또 한입에 소주 한잔…. 이러다 녹화 못 할까 싶은 맛. 정신을 차리고 그다음 메뉴를 채근했다. 동해안 사람들은 싱싱한 섭을 건져 주로 섭국을 끓인다. 흔히 먹는 홍합탕과는 다른 시원한 국물이 특징이다.

일단 섭을 잘 씻어 껍질째 삶는다. 끓는 물에 섭을 넣으면 입이 열리지 않으니 주의. 찬물에 넣고 처음부터 같이 끓여야 섭이 서서히 입을 연다. 적당히 끓으면 섭 살은 꺼내 썰고, 국물은 잠시 내려둬 불순물을 가라앉힌 뒤, 깨끗한 웃국만을 다시 부어 섭 살과 갖은 양념을 넣고 끓인다.

'백종원의 사계' 섭. 인터넷 캡처

'백종원의 사계' 섭. 인터넷 캡처

'백종원의 사계' 섭. 인터넷 캡처

'백종원의 사계' 섭. 인터넷 캡처

동해식 섭국의 포인트는 각종 채소와 국수를 넣어 얼큰하고 걸쭉한 맛을 내는 것. 이름은 국이지만 내륙의 어죽과 비슷한 느낌이 난다. 후루룩후루룩 국수와 함께 섭 살과 채소 건더기를 건져 먹고, 부족하면 국물에 밥을 말아 먹고, 그렇게 먹고 나면 늦가을 찬 바람에도 이마에 땀이 송송 맺힌다. 이것이 섭의 힘이다. 이젠 또 뭘 먹지?

송원섭 (JTBC 보도제작국 교양담당 부국장. 다양한 음식과 식재료의 세계에 탐닉해 ‘양식의 양식’, ‘백종원의 국민음식’, ‘백종원의 사계’를 기획했고 음식을 통해 다양한 문화의 교류를 살펴본 책 『양식의 양식』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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