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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금받아 돼지 잡겠다” 김우중 의료인상 받은 산골보건소장 [뉴스원샷]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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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순 무주공진보건진료소장. 사진 대우재단 제공

박도순 무주공진보건진료소장. 사진 대우재단 제공

전문기자의 촉: 어느 보건소장이 산골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경축, 박도순!! 무주의 자랑입니다"
전북 무주군 안성면 공진리에 최근 '박도순을 사랑하는 사람들' 명의의 현수막이 걸렸다. 박도순(54·간호사) 무주공진진료소장이 제1회 김우중 대우 의료인상 수상자가 된 걸 축하했다. 박 소장은 아직 누가 붙였는지 모른단다.

박 소장은 1989년 무주군 구천보건진료소장을 시작으로 32년 동안 산골 보건소장으로 살고 있다. 5개 마을 540명의 주민의 건강 문지기 역할을 한다. 주민의 절반가량이 65세 이상 노인이다. 평생 농사일에 망가진 노인들의 건강 파수꾼이 박 소장이다. 뱀에 물리거나 벌에 쏘인 노인들, 일하다 둑에 쓰러진 노인에게 달려간다.

"공공보건이, 소득이 향상됐다고 하지만 어르신을 돌볼 의료인(의사)이 상주해야 하는데 여건이 안 됩니다. 서울 대도시에 (모든 게) 집중돼 있는데, 저 같은 농촌과 섬의 의료인을 돌아봐 주셔서 감사하고 격려가 됩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박 소장은 9일 서울 중구 힐튼호텔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이렇게 소감을 말했다. 의료인을 대상으로 한 상이 무수히 많다. 대부분 유명 대학병원의 의사에게 돌아간다. 김우중 의료인상이 서울에서 4시간 떨어진 산골 보건소장을 주목한 게 특이하다.

보건진료소는 병원·약국이 없는 오지에서 간호사가 소장을 맡아서 24시간 365일 주민을 지킨다. 직원은 없다. 진료소에 달린 관사에서 산다. 한때는 관사 의무 거주 조항이 있었다. 응급 기능 때문이다. 때로는 방문 간호사, 왕진의사, 동네의원 원장, 응급실 의사, 약사 역할을 한다. 북 치고 장구 친다. 80년대 농어촌에 병원을 세울 돈도 없고, 의사를 보낼 수도 없어 보건진료소에 그 일을 맡겼다. 전국 2000여곳이 고령화된 농어촌의 1차 의료를 담당한다.

얼마 전 빨래를 널다 어깨가 빠진 할머니가 고통을 호소했다. 박 소장이 달려가 습관성 탈골임을 확인했다. 119가 올 때까지 할머니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새벽에 일 나가기 전 고혈압약을 타러 오거나 독감 접종하러 오는 사람도 있다. 15명 정도 환자를 보고 오후에는 이 마을 저 마을을 돌며 방문 간호에 나선다.

약을 갖다 주고, 혈압·혈당을 재고, 약을 잘 먹는지 점검한다. 이건 기본일 뿐, 어르신의 딸이 돼 말벗한다.

"우리 며느리가 말이야, 코로나 핑계로 오질 않더니 이젠 전화도 안 해."

"김장한 거 다 가져가더니 고맙다는 인사도 안 해. 배춧값도 안 줘."

이렇게 자식 흉을 보는 노인들에게 "나쁘네요"라고 맞장구를 친다. 노인들의 시시콜콜한 넋두리를 끊고 일어서기가 그리 힘들다고 한다.

보건진료소 현관 앞에는 농산물이 끊이지 않는다. 애호박·풋고추·깻잎·고구마·감자·옥수수·토마토·가지 등등. 애호박에 흙이 묻을까 봐 호박잎 위에 고이 올려져 있다. 새벽에 밭일 나갔다가 따다 놓은 것이다. 누가 갖다놓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더 많다. 이를 보고 자란 박 소장의 작은 딸(23)은 마트에서 야채를 돈 주고 사는 게 낯설다고 한다.

박도순 무주공진보건진료소장의 수상을 축하하는 현수막. 박도순 제공

박도순 무주공진보건진료소장의 수상을 축하하는 현수막. 박도순 제공

박 소장의 대학동기들 중 병원 수간호사나 간호부장이 더러 있다. 친구들이 "산골에서 왜 그리 오래 있니. 너 아니어도 갈 사람 있을 텐데"라는 말을 많이 한다. 박 소장은 "비료 부대에 한가득 담긴 상추가 현관 앞에 놓인 것을 보고 '과분한 사랑을 누리고 있구나, 나를 믿는 540명의 주민이 있지. 더 잘 보살펴야겠다'라고 결심한다"고 말했다.

박 소장은 상금(3000만원)으로 동네에서 돼지 한 마리를 잡고 식사하시라고 봉투를 전할 예정이다. 코로나19와 싸우는 동료 간호사를 위해 간호협회에도 기부금을 낼 예정이다.

대학병원에서 암 수술을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역사회에 깊숙이 들어가서 주민 건강을 밀착 마크하는 역할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보건진료소만큼 주민과 가까운 의료기관은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한국 의료를 평가할 때마다 "1차 의료 강화"를 항상 주문한다. 아마 보건진료소가 없었다면 더 형편없다고 평가했을지 모른다. 전국 2000여곳의 보건진료소 '박도순 소장들'에게 힘찬 박수를 보낸다.

☞김우중 의료인상

고(故) 김우중 대우회장은 1978년 3월 사재 50억원을 출연해 대우재단을 만들어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섬과 오지 무의촌 지역에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대우재단은 “무의촌지역에 양질의 포괄적 의료환경을 구축하는 데 대기업이 앞장서달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권유에 따라 완도(노화도)·진도(하조도)·신안(비금도)·무주(설천면) 등에 병원을 열었다. 김우중 의료인상은 이런 맥을 잇기 위해 올해 제정돼 섬과 오지의 음지에서 일하는 의료인을 시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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