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없는 교실, 역사수업은 방탈출 게임…미리본 고교학점제 현장

중앙일보

입력 2021.12.05 12:00

2일 능주고 학생들이 수학 수업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 4명의 학생이 짝을 지어 명제에 대한 반례를 찾는 활동을 하고 있다. 문현경 기자

2일 능주고 학생들이 수학 수업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 4명의 학생이 짝을 지어 명제에 대한 반례를 찾는 활동을 하고 있다. 문현경 기자

2일 오후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고등학교 교실에는 모니터 화면을 가운데 두고 학생들이 각자 노트북 컴퓨터를 펴고 둘러 앉아있었다. 중앙 모니터 화면에는 '세계사 방탈출 게임'이 띄워졌다. '인간 사회에도 자연세계와 같이 적자생존의 원칙이 작용한다는 이론은 무엇인가'와 같은 문제를 맞추면 힌트를 얻어 탈출을 하는 게임으로 수업이 진행됐다.

같은 시간 책상도 없이 긴 의자만 있는 학습스튜디오에서는 연극을 통한 경제 수업이 한창이었다. 국회의원 역할을 맡은 학생이 "우리 정부도 이에 맞춰 확대 통화 정책을 시행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전문위원 역할을 맡은 학생도 "신규 투자자가 참여할 수 있으려면 규제를 대폭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자 역할을 맡은 교사가 뿅망치를 내리치며 법안 표결을 선포했다.

세계사 수업시간에 '방탈출 게임'을 통해 단원 복습을 하고 있는 모습. 문현경 기자

세계사 수업시간에 '방탈출 게임'을 통해 단원 복습을 하고 있는 모습. 문현경 기자

문재인 정부의 핵심 교육 정책인 고교학점제는 2025년 전면 도입되기에 앞서 여러 학교에서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 학생이 원하는 수업을 마음껏 선택한다는 이 정책의 가장 큰 우려점은 상대적으로 여건이 열악한 지방에서도 제대로 운영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일반계 사립고인 능주고는 2019년부터 고교학점제 선도학교로 지정돼 실험이 진행 중이다. 문이과로 구분했던 예전에는 교과목이 48개였지만 올해엔 71개 교과목이 편성됐다. 구글 클래스룸을 통해 학생들의 수요를 조사했고, '심리학' '영미 문학 읽기' '과학사' '국제법' 같은 과목들이 생겼다.

학생 태도 달라지고 입시 결과도 '만족' 

학생들은 입학 전 실시한 진로 적성 학업검사를 토대로 상담과 학업 설계를 시작한다. 중간에 진로를 변경할 수도 있다. 학생들은 진로 선택에 도움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 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박시윤 군은 "1학년때 인문과학 학술캠프에 참여하며 행정학 관련 책을 읽다 '스마트 도시'라는 개념을 처음 접하고 흥미가 생겼다"면서 "선생님들과의 상담을 통해 관련 전문가가 되려면 도시공학과에 진학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고 진로를 정한 뒤에는 융합과학, 한국지리 등 관련 과목을 듣고 있다"고 말했다.

능주고등학교는 학점제형 공간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했다. 사진은 학생들이 고른 헌법 조항으로 꾸며진 공간이다. 문현경 기자

능주고등학교는 학점제형 공간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했다. 사진은 학생들이 고른 헌법 조항으로 꾸며진 공간이다. 문현경 기자

고교학점제로 학교 공간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정선호 교육과정부장은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해 교실을 리모델링했는데, 완성된 공간을 보며 교사로서 감동할 때가 많았다"고 말했다. 정일한 교사는 "본인이 하고 싶은 과목을 선택할 수 있게 된 후 수업시간에 자는 학생이 거의 없어지고 태도도 능동적으로 바뀌었다"며 "이제는 활동형·프로젝트형 등 학생들이 참여하는 수업이 아니면 진행이 어려울 정도"라고 말했다.

학부모들이 가장 걱정했던 입시 결과도 고무적이다. 송완근 교장은 "학생들이 과목을 선택하게 되면 내신에서 불리해지지 않을지, 대학 입시가 어떻게 될 것인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 "올해 대입 전형이 진행중이긴 하지만 주요 대학 1단계 합격 결과로 보면 개교 이래 가장 성과가 좋다"고 말했다. 송 교장은 "학교에서의 여러 활동이 학생의 진로에 맞춰져 있고 이를 충실히 기록했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했다.

'고교학점제' 양대 교사 단체는 반대

하지만 학교 현장에서는 고교학점제에 대한 우려가 많다. 부영그룹이 운영하는 능주고는 지방 일반고이지만 탄탄한 재정 뒷받침을 할 수 있는 재단이 있다. 모든 학교가 비슷한 지원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성공 여부는 불투명하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노조원들이 지난달 4일 정부세종청사 교육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뉴스1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노조원들이 지난달 4일 정부세종청사 교육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뉴스1

보수 성향 한국교총뿐 아니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도 고교학점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전교조는 지난달 고교학점제를 재검토하라는 1만여명 교사의 서명을 교육부에 전달했다. 대입제도 개편, 교사 증원 없이 고교학점제를 도입하면 득보다 실이 더 많다는 주장이다.

전교조 출신인 장석웅 전남교육감은 "(전교조 등이) 본질적 측면에서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며 "교사 등 관련 인프라가 미흡하다는 것이지 고교학점제의 의미 자체에 반대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장 교육감은 "학생들은 자신이 선택한 수업에 보다 흥미를 느낀다"면서 "서울보다 여건이 열악한 만큼 좋은 교사 풀을 만들어 전남 전체 공동교육과정을 운영해 다양한 수업을 제공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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