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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백담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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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장주영 기자 중앙일보 기자
장주영 내셔널팀 기자

장주영 내셔널팀 기자

내설악 심산유곡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백담사는 신라 진덕여왕(28대) 때인 647년에 창건된 고찰이다. 본래 한계사라는 이름으로 불려오다 1783년 조선 정조 임금 때 백담사로 개칭했다. 백담사 홈페이지는 “전설에 의하면 백담사라는 이름은 설악산 대청봉에서 절까지 작은 담(潭·연못)이 100개가 있는 지점에 사찰을 세운 데에서 일컫게 되었다”고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백담사는 참회와 수행의 공간으로 더할 나위 없다. 시원한 백담계곡과 울창한 원시림은 방문객을 절로 숙연해지게 만들고, 복잡한 세상의 번뇌를 잊게 한다. 만해 한용운은 1905년 백담사에서 머리를 깎고 정식 출가했으며,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했다. 그의 대표작 ‘님의 침묵’도 이곳에서 지었다. 조계종은 이곳을 기본선원으로 지정해 운영 중이다. 갓 득도한 승려들이 참선 수행을 하러 온다.

1988년에도 참회를 이유로 백담사를 찾은 이가 있다. 지난 23일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그는 퇴임 9개월 만에 5·18과 5공 비리 책임자 처벌 요구가 거세지자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뒤 부인 이순자씨와 함께 백담사로 들어갔다. 당시 “어떠한 비난과 추궁도 각오한다”면서 재임 기간 중의 자신의 과오와 비리를 시인하고 사과했다. 쓰고남은 정치자금 139억원과 개인 자산 24억원을 국가에 헌납한다고도 했다.

그러나 마지못해 내놓은 사과엔 진정성이 없었다. 백담사에서의 769일간 은둔 생활을 마친 후 돌아와서는 은닉 재산이 발각되기도 했다. 그는 1995년 구속기소돼 내란죄 및 반란죄 수괴 혐의로 1심에서 사형을,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97년 12월 사면·복권됐다. 그래도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특히 현대사의 비극인 5·18과 관련해선 책임을 부정하는 자세로 일관해왔다. 아들이나 지인을 통해 사죄의 뜻을 표한 노태우 전 대통령과 대비됐다.

공교롭게도 전 전 대통령이 사망한 날과 백담사로 들어간 날은 모두 11월 23일이다. 33년의 시차를 두고서다. 이 기간 숱한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끝내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았다. 참회보다 회피를 위해 백담사 유배를 택했던 33년 전의 그 날, 그의 시간은 멈춰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