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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개헌론 부르는 ‘오징어 대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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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서승욱 정치팀장

서승욱 정치팀장

초반부터 대선전 풍경이 험악하다. 거친 언어의 향연이다. 이재명 대 윤석열 대진표 완성이 가속을 붙였다. 어차피 양측 모두 예상했던 구도다. ‘0선’ 정치신인의 대결이다. 그럼에도 역대 최고의 비호감 매치다. 양 진영이 반대쪽 후보를 극단적으로 증오한다. 두 후보의 강렬한 개성이 상대방의 증오를 부추긴다. 진영은 양극단으로 갈렸다. 그래서 중도층 포섭이 중요하다. 찍을 사람이 없다는 2030도 타깃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압도적인 정권교체 여론에서 중도층과 2030을 떼 내야 한다. 국민의힘의 목표는 그 반대다. ‘닥치고 정권교체’를 퍼 날라야 한다. 낙선한 홍준표는 이렇게 말했다. “차기 대선판이 석양의 무법자처럼 돼 간다. 지는 사람은 감옥 가야 하는 처절한 대선이다.” 그는 이번 대선을 ‘이전투구(泥田鬪狗)’라고 했다. ‘진흙탕에서 벌어지는 개싸움’이란 뜻이다. 양 진영이 사활을 건 지저분한 전쟁, 이전투구의 2021년 버전은 ‘오징어 게임’이다.

비전 경쟁보다 상대 약점 들추기
네거티브 정보 놓고 후보 골라야
‘오징어 게임’ 속 징검다리와 비슷

오징어 대선에서 주요 무기는 네거티브다. 두 후보와 주변은 루머도 많고, 흠결도 보인다. 약한 고리가 적지 않다. 그래서 네거티브의 좋은 먹잇감이다. 상대 후보를 향한 무차별적 공격이 작렬한다. 윤석열 X파일, 이재명 지라시가 그런 범주다. 익명에 숨은 무책임한 공격은 조악하지만 화끈하다. 사실이라면 대선 출마가 어려운 섬뜩한 내용이다.

김회룡기자

김회룡기자

후보와 가족을 겨냥한 거친 험담이 SNS을 타고 번진다. 부인의 낙상 사고 관련 루머에 후보는 CCTV와 119 신고 녹취까지 공개해야 했다. 하루하루가 ‘가짜뉴스’와의 전쟁이다. 반대로 종로 한복판에선 야당 후보 공격이 한창이다. ‘쥴리 벽화’에 이어 ‘개 사과 벽화’가 등장했다. 야구장에 부인 없이 혼자 등장한 걸 두고도 비방이 넘쳐난다. 거짓, 마타도어, 역정보가 절묘하게 섞인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모두 두 동강이 났다.

후보와 당 지도부도 마찬가지다. 상호 존중은커녕 체면까지 버렸다. 윤 후보는 “누가 보더라도 대장동 게이트의 몸통은 이재명”이라며 “내가 대통령이 되면 화천대유의 주인은 감옥에 갈 것”이라고 했다. 반면 이 후보는 “(윤 후보의) 본부장(본인·부인·장모) 비리는 드러난 게 많다”고 했다. 그러자 제1야당 대표는 “우리 후보 가족을 건드렸으니 앞으로 자신감 있게 이 후보의 가족을 건드리겠다”고 한다. 100배 더 화끈한 ‘19금 막장 대결’ 선전포고다.

대선의 수준도 추락한다. 캠페인의 방점은 “내가 이렇게 하겠다”보다 “상대방이 이기면 망한다”에 찍힌다. 정책 대결은 빈약하다. 이제 막 불붙은 부동산 보유세 논란 정도가 전부다. 후보들의 관심 역시 비호감 유도와 낙인찍기다. ‘손바닥 왕(王)자’ ‘아수라’ 이런 언어가 대선판을 지배한다. 비전 대결보다 상대 허물과 실언을 부각하는 게 효과가 크다. 인상 투표와 증오 투표의 끝없는 되돌이표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5번째는 징검다리 게임이다. 앞에 놓인 강화 유리와 일반 유리를 열여덟 번 연속으로 구별해야 살아남는다. 구별을 위한 정보 제공은 없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선과 흡사하다. 풍부한 건 상대방에 대한 비방 정보다. 정책과 비전에 관한 정보는 제한됐다. 그들이 집권할 때 미래 한국 5년의 그림이 잘 안 그려진다. 어느 쪽이 강화 유리인지 일반 유리인지, 아니면 둘 다 일반 유리인지 알 길이 잘 없다.

그래도 골라야 한다. 나라가 땅으로 꺼질지, 유리 위에 남을지는 운에 맡긴다. 그런데도 이기기만 하면 무소불위의 천하를 얻는다. 비호감도가 60%를 넘나드는 이들 중 한 명이 그 어마어마한 권력을 잡는다. 권력을 쥐면 살고, 놓치면 죽는다. 그래서 진영 대결이 진영 전쟁, 결국 진영 학살로까지 번진다.

5년짜리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4개월 앞이다. 그런데 오히려 분권에의 요구가 분출된다. 이례적이고 역설적이다. 9월 말~10월 초 중앙일보의 리셋코리아 개헌 분과와 한국리서치의 웹 여론조사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선호하는 정부형태로 분권형 대통령제를 꼽은 이가 절반을 넘었다. 반면 현행 대통령 중심제에 대한 선호도는 15%가 채 안 됐다.

성공 확률이 현저히 떨어지는 징검다리 게임에 나라 5년의 운명을 걸어야 할까. 이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다. 필자 주변의 ‘나라를 걱정하는’ 소위 중도층 한 사람이 말했다. “어느 후보가 이겨야 나라가 덜 망할지가 내 판단 기준이다.” 정말 서글픈 선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