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런던 전철역 아케이드서 피아노 치던 남루한 할아버지

중앙일보

입력 2021.11.15 11:00

[더,오래] 전명원의 일상의 발견(18)

아직 동이 트지 않은 검푸른 빛의 시골 마을 골목길에서 유키 구라모토가 연주하고 있었다. 좋아하지만 잘 알지는 못하는 피아노의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푸른빛으로 함께 올라오는 소리를 보았다. 소리의 풍경이었다.

흰머리, 굽은 어깨 그리고 주름진 손으로 피아니스트는 새벽 공기 속에서 연주하고 있다. 그가 연주하는 동안 골목 끝 먼 하늘이 조금씩 붉어진다. 불 꺼진 가게에 불이 켜지기도 한다. 그리고, 연주하는 그의 등에 좀 더 환한 빛이 얹힌다. 연주를 끝마친 그는 일어나 떠오르는 해를 향해 기지개 켜듯 손을 번쩍 치켜든다.

그렇게 유키 구라모토의 ‘DAWN 연주’ 영상이 끝났다.

세인트판크라스역 어딘가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피아노 소리를 따라가보니, 넓은 통로 한가운데에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있었고 허름한 차림의 할아버지가 연주하고 있었다. [사진 pixabay]

세인트판크라스역 어딘가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피아노 소리를 따라가보니, 넓은 통로 한가운데에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있었고 허름한 차림의 할아버지가 연주하고 있었다. [사진 pixabay]

2020년 코로나19가 우한 폐렴으로 불리던 시기였다. 설마 이렇게까지 전 세계적인 팬데믹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초창기였으므로 이미 여러 달 전 계획한 런던 여행을 떠났다. 꿈꾸어 오던 히드로 공항에 내렸다. 런던 여행의 시작이었다.

호텔은 세인트판크라스역 앞에 있었기에 여행 기간 내내 매일 드나들었다. 큰 역 몇 개가 모여 있어 복잡하고,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이었다. 넓고 환한 아케이드도 옆에 있었는데 간식을 사거나, 소소한 물건을 구경하느라 호텔로 들어오는 길에 늘 기웃기웃했다.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피아노 소리를 따라갔을 때, 아케이드의 넓은 통로 한가운데에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있었고, 허름한 차림의 할아버지가 연주하고 있었다. 몇몇은 서서 그 연주를 들었고, 대부분은 지나가며 흘깃 보거나 별 관심이 없었다.

후줄근한 후드티에 남루한 청바지를 입고 할아버지는 진지하게 연주를 이어갔다. 그의 연주가 끝나고 나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람들은 다시 갈 길을 갔다. 그 역시 악보를 접어 낡은 백팩에 넣고는 무심하게 일어나 어디론가 사라졌다.

런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전날 저녁이었다. 다시 그 아케이드에 들렀다. 여전히 사람들이 분주하게 지나다녔다. 상점에서 간식거리를 사고 나오는 길에 피아노 앞으로 다가가는 그 할아버지를 다시 보았다. 여전히 남루한 청바지에 후줄근한 후드티를 입고 낡은 백팩을 들고 있었다. 악보를 꺼내어 피아노 위에 올려놓고 의자를 당겨 앉더니 연주를 시작했다.

몇 사람 사이에 섞여 나도 그의 연주를 들었다. 그의 연주가 끝나기 전 나는 자리를 떠나 긴 아케이드를 걸어 나왔다. 어쩐지 그가 연주를 끝내고, 악보를 백팩에 넣고, 일어서서 돌아가는 장면은 남겨두고 싶었다. 피아노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멀어졌지만 그는, 계속 연주하고 있을 것 같았다. 내 런던 여행이 끝났지만 여전히 계속되었으면 하고 바라듯이 말이다.

런던에서 돌아온 지 두 해가 다 되어온다. 런던에서 돌아오자 우한 폐렴은 코로나19라는 이름을 달았고, 전 세계로 무섭게 퍼져나갔다. 인생에서 이런 두 해를 보내기도 하는구나 싶을 만큼 상상 못 했던 시간이 이어지고 있다. 내가 다녔던 많은 다른 나라의 도시들을 생각할 때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가령 로마에선 호텔 앞 성당의 새벽 종소리였다. 베이징에선 이름 모를 뒷골목의 버드나무였고 말이다.

나는 가끔 런던을 생각할 때면 늘 그 세인트판트라스역의 피아노 치던 남루한 할아버지가 먼저 떠오른다. 그의 연주는 전문 연주자의 것은 아니었다. 가끔 음을 틀리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런던 이미지는 버킹엄궁전도, 해리포터도 아닌, 그의 피아노 소리로 남았다.

런던하면 지하철 아케이드에서 피아노를 치던 할아버지가 먼저 떠오른다. [중앙포토]

런던하면 지하철 아케이드에서 피아노를 치던 할아버지가 먼저 떠오른다. [중앙포토]

유키 구라모토의 DAWN 연주 영상을 다시 보았다. 나이를 많이 먹도록 무언가를 오래 해온 사람의 뒷모습이 있었다. 런던 지하철역에서 피아노를 치던 남루한 할아버지도 생각했다. 무언가를 진지하게 좋아하는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비슷한 나잇대의 둘은 인종도 같지 않을 뿐 아니라 한 명은 세계적인 연주자이고, 또 한 명은 누가 들어도 아마추어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어쩐지 닮아 있었다.

오래도록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 오랫동안 한 가지를 꾸준히 한다는 것, 그리고 오랜 후에도 여전히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오늘도 여전히 런던의 그 지하철 아케이드에선, 그가 서투르지만 진지한 연주를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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