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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하루 백보에서 만보로 늘리니 보이는 원천리천 풍경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전명원의 일상의 발견(17) 

하루에 백보도 안 걷는 날이 많았던 인간이 어느 날 갑자기 만보씩 걸어보기로 했다. 첫 시작은 베란다의 세탁기까지 얼리던 겨울의 맹추위가 잠시 주춤한 겨울의 오후였다. 집을 나서기 전부터 쓸데없이 비장하게 머리를 굴렸다. 어찌하면 만보짜리 코스를 만들 수 있을까 궁리했다.

극과 극을 달리는 나란 인간은 일단 저지르면 다 된다는 무계획의 아이콘임과 동시에, 머릿속에 시뮬레이션까지 작동시켜야 맘이 놓이는 프로계획러이기도 하다. 막상 하루에 만보를 걸어야겠다고 즉흥적으로 결정하고 나니, 이번엔 그 루트를 짜느라 다시 또 계획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보 코스로 걸음 수까지 대략 계산해서 머릿속에 루트를 넣었다.

원천리천은 수원시 영통구 하동에서 발원해 신대저수지와 원천저수지를 지나 황구지천으로 합해지는 지방하천이다. 내가 사는 동네에 바로 그 원천리천이 지나간다. 잘 정비되고 가꾸어진 천변의 산책길은 지나가며 보아도 걷기 좋은 길이다. 동네 토박이라고 얘기하기 부끄럽게도 두세 번 가본 것이 전부이지만, 걷자고 생각하니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이었다.

말년에 부모님은 얻어온 개를 한 마리 길렀는데 그 녀석을 데리고 천변을 산책하자고 다 같이 나섰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집밖에 나오자 벌벌 떨며 움직이지를 못했다. 결국 한 덩치 하는 개를 엄마가 머리에 이고 천변을 산책했다. 그날, 개를 머리에 이고 가는 엄마의 사진은 오래도록 엄마 핸드폰의 배경화면이었다. 엄마가 개를 머리에 이고 걷던 그 원천리 천변을 혼자서 걷기 시작했다.

겨울 오후의 산책길엔 사람이 제법 많았다. 유모차를 끄는 젊은 엄마, 동네 친구인 듯 보이는 아주머니들이 지나갔다. 걷기도 숨찬데 뛰며 운동하는 젊은 청춘도 있었다.

노부부는 손을 꼭 잡고 걸었다. 또 다른 노부부는 앞서가는 할아버지가 뒤의 할머니를 챙겼다. “빨리 와!”라고 했지만 딱히 재촉하는 것도 아니었고, 뒤따르는 할머니 역시도 그 소리에 서두르지 않았다. 느릿한 오후의 시간이었다.

잘 정비되고 가꾸어진 원천리천의 산책길은 지나가며 보아도 걷기 좋은 길이다. [사진 전명원]

잘 정비되고 가꾸어진 원천리천의 산책길은 지나가며 보아도 걷기 좋은 길이다. [사진 전명원]

아빠도 나이 들며 엄마하고만 다니셨다. 젊어서 그 많던 술친구를 다 어쨌느냐고 엄마는 타박했지만, 부모님은 늘 함께 다녔다. 원천리천변을 걸으며 부모님 생각을 많이 했다. 이제 부모님은 안 계신 세월이니 그저 아련했다.

그렇게 원천리천을 걸으며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그리고 한여름의 꼭대기를 지나고 어느새 가을이다. 천변을 걸으며 지난 겨울의 마지막 눈을 맞았다. 무게 없이 날리듯 내린 눈은 겨울 끝자락이 무색하게 바닥에 금세 쌓였지만, 다음날 산책로에 나왔을 때는 흔적도 없이 녹아있었다.

눈이 녹은 자리에 푸릇푸릇 싹이 돋았다. 물가에 선 버드나무의 늘어진 가지가 연둣빛으로, 그리고 날이 더워지며 진한 초록으로 너울대는 것을 보며 걸었다. 꽃이 피어났다. 덤불이 우거졌다. 물 속엔 더러 팔뚝만 한 잉어들이 몰려다녔다. 원천리천을 걷는 동안 그렇게 매일매일 풍경이 달라지고, 달라지는 풍경으로 시간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원천리천 산책로에서 나오는 길은 아주 많다. 나는 주로 매탄 권선역 앞으로 들어가서 쭉 걸었다. 그리고는 광교로 넘어가기 전 사거리에서 출구로 나오거나, 걸어온 길을 되짚어 걸었다.

가면서 오천보를 걷고, 되돌아오며 다시 오천보를 채운다. 원천리천의 반환점을 돌며 방향이 바뀌는 풍경을 본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알게 모르게 이러한 반환점을 만나는 순간이 분명 있다. 그 순간이 중년의 나이, 꺾어진 오십뿐은 아닐 것이다. 나이와 관계없이 우리는 종종 삶의 방향이 바뀌고, 풍경이 바뀌는 인생의 반환점을 맞이한다. 그것은 원천리천변의 산책길처럼 누가 정해주지 않는다. 내 의지로 방향을 바꾸며 반환점으로 삼는 것이다. 그렇게 방향이 바뀐 길에서 우리는 역시 묵묵히 꾸준하게 걸어간다.

지금 나는 원천리천의 어디쯤을 걷고 있는 것일까. 가을 바람이 소슬하고, 나뭇잎의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오늘도 원천리천변은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이지만 그 편안함과 느릿함이 여유롭다. 인생도 늘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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