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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없었으면 넘어졌을 것” 한국어경진대회 수놓은 26개 사연

중앙일보

입력

지난달 30일 줌에서 열린 스바보다센터의 한국어 말하기 대회. 본인 차례가 오면 한 가지 주제에 대해 3분간 한국어로 말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사진 줌 캡처

지난달 30일 줌에서 열린 스바보다센터의 한국어 말하기 대회. 본인 차례가 오면 한 가지 주제에 대해 3분간 한국어로 말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사진 줌 캡처

“레드우드란 나무는 높이가 110m인데 뿌리는 3m밖에 안 돼요. 어떻게 수천 년을 이겨냈을까요?”

줌(Zoom) 화면에 등장한 30대 외국인 여성의 목소리는 어눌했지만 또렷했다. 우크라이나에서 3남매를 키우는 엄마라고 자신을 소개한 미후따호바 따찌야나(33)는 서툰 한국어로 10년 전 아들을 낳았을 때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정일보다 1달 먼저 태어난 아들은 몸이 성치 않았다. 폐렴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아이를 보며 엄마는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고 한다.

의료진의 분투와 주위의 도움 덕에 가까스로 고비를 넘겼고 점차 상태가 나아졌다. “한국어를 가르쳐주던 한국인 멘토의 도움이 컸다”는 게 미후따호바 따찌야나의 말이다. 그는 “혼자였다면 넘어졌을 것”이라며 “주변 나무와 뿌리로 연결돼 거센 바람을 이겨내는 레드우드처럼 나도 주변 사람 덕에 힘든 시기를 버틸 수 있었다”고 미소를 지었다. 발표가 끝나자 랜선으로 모인 청중과 심사위원은 박수로 화답했다.

지난달 30일 스바보다센터의 한국어 말하기 대회가 줌으로 열렸다. 사진 스바보다센터 제공

지난달 30일 스바보다센터의 한국어 말하기 대회가 줌으로 열렸다. 사진 스바보다센터 제공

지난달 30일 온라인으로 열린 스바보다센터의 한국어 경진대회 한 장면이다. 스바보다센터는 지난 2019년 2월 국내 러시아권 이주민의 정착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민간 기관이다. ‘스바보다’는 러시아어로 자유를 뜻한다. 센터는 러시아권 이주민 5000여명이 모여 사는 인천 연수구 함박마을에 터를 잡고, 고려인 방과 후 교육과 실버교육 등을 해왔다.

줌에서 펼쳐진 한국어 경진대회

스바보다센터는 성별·국적·거주지 등과 상관없이 러시아어를 할 수 있다면 누구든 이번 대회에 참가할 수 있게 했다. 국내 러시아어 사용자로 자격을 제한했던 지난 대회보다 문호를 넓혔다. K-POP 등 한국 문화가 주목을 받는데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에 교류가 제한되는 게 안타까워 내린 결정이라고 한다.

고려인 커뮤니티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서 입소문을 탔고 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외국인 71명이 도전장을 던졌다. 1차 영상 전형을 통과한 26명이 랜선 속 본선 무대에서 자웅을 겨뤘다. 인생의 특별한 일, 꿈, 한국, 등 7가지 주제 중 하나를 골라 3분간 한국어로 발표하는 방식이었다.

랜선 무대 채운 26가지 한국어 사연

참가자들은 한국인과 한국어가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줬다고 입을 모았다. 우크라이나에 사는 림 이리나(29)는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 탓에 어린 시절은 절망 그 자체였다. 아버지가 살해되면서 엄마와 힘겹게 삶을 이어왔다”며 “나는 평생 결혼하지 못할 것 같았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우연히 한국에 자원봉사를 오게 되면서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졌고 삶이 달라졌다”며 “한국에서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고 한국어로 말하고 쓸 수 있게 되면서 두려움이 별거 아니란 걸 깨달았다”고 했다. 지난해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그는 “아버님, 어머님, 남편, 언니와 같은 단어를 말할 때마다 심장이 멈출 것 같이 감격스럽다”고 전했다.

슈뚜르막 빅토리아(37)는 입양하게 된 계기를 이야기했다. 그는 “사고로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되면서 힘들었다”며 “한국어 수업을 들으면서 만난 한국인 멘토가 입양을 제안하면서 내 인생이 바뀌었다”고 했다. 그는 “그때 받은 용기 덕에 사랑스러운 아이와 만나게 됐고 최고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며 웃었다.

심사위원은 발표 내용에 비중을 두고 표현력과 태도 순으로 점수를 매겼다고 한다. 미후따호바 따찌야나가 우승했고 슈뚜르막 빅토리아 등이 뒤를 이었다. 한 심사위원은 “상금 액수가 크지 않았지만, 러시아어권에선 큰돈이라 수상자들이 뛸 듯이 기뻐했다”고 말했다.

러시아어권 이주민들이 스바보다센터의 실버교육에 참여하고 있다. 사진 스바보다센터 제공

러시아어권 이주민들이 스바보다센터의 실버교육에 참여하고 있다. 사진 스바보다센터 제공

스바보다센터는 러시아어권 이주민을 위한 활동을 확대할 방침이다. 언어문제로 학교에 적응을 못 하는 청소년을 위해 대안학교를 만드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임홍순 스바보다센터장은 “러시아어권 사람들이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고 싶어하는 열망이 크다”며 “이번 행사를 계기로 활동을 늘리고 한국어경진대회가 공신력 있는 대회가 될 수 있게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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