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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판의 고수’ 왕빙난, 중·미 대사급 회담 대표 9년 맡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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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2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02〉

제네바 공항에 도착한 저우언라이. 회색 코트 차림이 대표단 비서장 왕빙난. 저우와 왕 사이가 장정 시절 중공 총서기를 역임한 장원텐(張聞天). [사진 김명호]

제네바 공항에 도착한 저우언라이. 회색 코트 차림이 대표단 비서장 왕빙난. 저우와 왕 사이가 장정 시절 중공 총서기를 역임한 장원텐(張聞天). [사진 김명호]

1995년 가을, 베이징의 스자후퉁(史家胡同)에서 차오관화(喬冠華·교관화)의 부인 장한즈(章含之·장함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냉전 시절 중국외교의 주역은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와 천이(陳毅·진의) 원수, 차오관화였다.” 왕빙난(王炳南·왕병남)에 관해 물었더니 입을 다물었다. 사연이 있는 것 같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미안했던지 헤어질 때 몇 마디 해줬다. “왕빙난 부장은 저우 총리의 그림자였다. 중·미 대사급 회담의 중국 측 대표를 9년간 역임했다. 담판의 고수였다. 중·미관계 개선에 큰 업적을 남겼다.” 과장이 심하다는 생각은 잠시였다. 닉슨과 키신저의 중국방문을 체험하고, 유엔 대표까지 역임한 노부인의 말이다 보니 무게가 있었다.

왕 “장제스는 사람을 믿지 않아”

1965년 1월, 재외 공관장을 접견하는 마오쩌둥. 둘째 줄 왼쪽 첫째가 왕빙난. [사진 김명호]

1965년 1월, 재외 공관장을 접견하는 마오쩌둥. 둘째 줄 왼쪽 첫째가 왕빙난. [사진 김명호]

왕빙난은 18세 생일날 시안(西安)에 있는 중공 지하당을 제 발로 찾아갔다. 주둔군(西北軍) 사령관 양후청(楊虎城·양호성)의 친구였던 부친 덕을 봤다. 낮에는 국민당 시안시 선전부장 행세하고, 해가 지면 공산당 지하공작에 열중했다. 양은 장제스(蔣介石·장개석)에게 불만이 많았다. 하루는 평소 눈여겨보던 왕에게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장제스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대답이 엉뚱했다. “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들었다. 사실이라면 은혜를 망각하고 배신을 밥 먹듯 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승천할 기세지만 말로가 좋을 리 없다. 하늘 문턱까지 갔다가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듣기를 마친 양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왕에게 해외 유학을 권했다 “돈 걱정하지 말고 외국 친구 많이 사귀도록 해라.” 왕은 일본을 거쳐 유럽으로 갔다. 베를린에 거처를 정하고 유럽 각국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학생조직에 가입하고 국제반제동맹(國際反帝同盟)에도 이름을 올렸다. 칭송이 자자했다. “왕빙난은 외교관 자질을 타고났다. 하고 싶은 말 다해도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한 적이 없다.”

1935년 일본의 중국 침략이 가속화되자 왕빙난은 귀국했다. 중공은 왕의 국제적 감각을 높이 샀다. 중공주재 코민테른 대표 자격으로 시안에 파견했다. 당시 시안에는 양후청의 서북군과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의 동북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장과 양이 연합해 장제스를 감금, 중공과 항일전쟁을 치르자고 촉구한 시안사변에서 왕빙난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는 밝혀진 적이 없다. 국·공 합작으로 기사회생한 마오쩌둥이 공로를 치하하는 친필서신 보낸 사실로 짐작만 가능할 뿐이다. 시안에 와서 장제스와 담판한 저우언라이의 극찬은 입에 침이 마를 정도였다. “빙난은 내 수하가 아니다. 내가 의지하는 친구다. 내 왼팔이고 오른팔이다. 나의 귀와 눈, 혀 역할도 혼자서 다 했다.”

1971년 10월, 원수 예젠잉(葉劍英)과 함께 두 번째 중국에 온 키신저와 닉슨의 방중 일정을 토의하는 저우언라이, 예와 키신저 사이가 장한즈. [사진 김명호]

1971년 10월, 원수 예젠잉(葉劍英)과 함께 두 번째 중국에 온 키신저와 닉슨의 방중 일정을 토의하는 저우언라이, 예와 키신저 사이가 장한즈. [사진 김명호]

항일전쟁 시절 왕빙난은 저우언라이가 지휘하는 중공 남방국에서 외교업무를 전담했다. 외국 기자들은 왕만 만나면 받아 적기에 바빴다. 중공 근거지 옌안(延安)에 미군시찰단을 끌어들이고 벽안(碧眼)의 기자들이 옌안을 활보하게 만든 것도 왕빙난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마오쩌둥은 왕의 담판과 선전 능력을 높이 샀다. 전쟁 승리 후 장제스와 담판하기 위해 충칭(重慶)에 왔을 때 비서로 임명했다. 마오는 왕이 안배한 문화인과 민주인사들 만나며 진면목을 과시했다. 항간에 떠돌던 이상한 소문들을 불식시켰다. 충칭을 떠나던 날 마오는 왕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했다. “너 같은 낙천가는 처음 본다. 나는 낙천가를 좋아한다. 나도 낙천가다. 그간 우리는 전쟁만 했다. 외교가 뭔지 모른다. 앞으로 외교관이 필요할 날이 온다. 외교관은 너 같은 낙천가라야 한다. 낙천가를 많이 발굴해서 양성해라.”

마오 “왕빙난, 선발대 인솔자로”

옌안 시절의 장원진과 부인 장잉(張潁). 중·미 수교 후 2대 주미대사를 역임했다. [사진 김명호]

옌안 시절의 장원진과 부인 장잉(張潁). 중·미 수교 후 2대 주미대사를 역임했다. [사진 김명호]

6·25전쟁 정전협정 후, 미국과 중국의 적대관계는 극에 달했다. 1954년 4월 26일, 한반도와 인도차이나 문제를 토론하기 위한 정치회담이 제네바에서 열렸다. 중국은 외교부장을 겸하던 저우언라이와 부부장 겸 중앙군사위원회 정보국장 리커농(李克農·이극농)을 필두로 대표단을 짰다. 판문점 정전회담을 막후에서 지휘한 리커농이 저우에게 건의했다. “미국과 접촉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나는 중국어 외엔 할 줄 아는 말이 없다. 서구에 아는 사람이 많고 국제관계에 정통한 왕빙난을 전면에 내세우자.” 저우도 같은 생각이었다. 마오쩌둥도 무릎을 치며 찬성했다. “폴란드 대사가 공석이다. 회담을 마치면 부임시켜라. 대표단 비서장 자격으로 선발대를 인솔해 제네바로 보내라. 푸쇼창(浦壽昌·포수창)과 장원진(章文晉·장문진)도 선발대에 투입해라. 중국은 큰 나라다. 대표단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각 분야의 전문가 200명 정도는 돼야 나라 체면이 선다.” 저우가 가볍게 이의를 제기했다. “장원진은 독일 유학생 출신이다. 영어에 독일어 억양이 강하다.” 마오가 손사래를 쳤다. “장원진은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았다. 옌안 시절 조악한 의상에 몇 달간 세수 안 해도 귀태가 넘쳤다. 푸쇼창은 하버드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미국 측에서 먼저 접근할 가능성이 있다.”

회의 시작 이틀 전, 1954년 4월 24일 오후, 중국대표단 200명을 태운 항공기 두 대가 제네바 공항에 도착했다. 소련대표 몰로토프가 리커농과 왕빙난에게 중요한 정보를 줬다. “사석에서 미 국무차관 스미스와 대화를 나눴다. 미국의 중국 정책이 비현실적이라며 투덜댔다.” 왕빙난은 스미스의 행동을 주시했다. 회의 마지막 전날 바에서 차를 마시던 중 스미스가 칵테일 잔 들고 푸쇼창에게 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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