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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내 미국 간첩 사건, 냉전 초기 양국 대화 촉진시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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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1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01〉 

반공주의자 닉슨의 중국 방문은 15년간 거미줄처럼 이어온 대사급 회담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1972년 2월 21일, 베이징 교외의 군용공항에 도착 한 닉슨 일행을 영접하는 저우언라이(앞줄 왼쪽). [사진 김명호]

반공주의자 닉슨의 중국 방문은 15년간 거미줄처럼 이어온 대사급 회담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1972년 2월 21일, 베이징 교외의 군용공항에 도착 한 닉슨 일행을 영접하는 저우언라이(앞줄 왼쪽). [사진 김명호]

도둑질이 직업인 사람들이 같은 부류들을 더 증오하는 것처럼, 전쟁 좋아하는 사람들이 평화를 더 입에 올린다. 법과 상식 어기기를 밥 먹듯 하는 정객과 정치판 기웃거리는 지식인들도 비슷하기는 마찬가지다. 냉전 시절, 전쟁으로 입신한 강대국 지도자일수록, 입만 열면 평화를 노래했다.

냉전 초기, 엉뚱한 사건이 미국과 중국의 대화를 촉진시켰다. 1954년 11월 중국 인민최고법원이 미국 간첩 사건을 판결했다. 미국 정부는 중국주재 영국대사를 통해 중국 측에 사건 조회를 의뢰했다. 국무부는 부본(副本)을 유엔 사무총장 함마슐드에게 보냈다. 회원국에 배포를 요구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도 가만있지 않았다. 검찰이 작성한 기소이유서와 판결문 외에 항의 서신까지 유엔총회 의장에게 발송했다. “미국 간첩 사건은 중국의 내정문제다. 우리의 법률은 존엄하다. 유엔이 간섭할 문제가 아니다. 적들이 매도해도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다.”

유엔 사무총장, 베이징 방문

왕빙난(왼쪽 둘째)은 사연 많고 비밀도 많은 외교관이었다. 왼쪽 셋째는 중국 극작가협회 주석 샤옌(夏衍). [사진 김명호]

왕빙난(왼쪽 둘째)은 사연 많고 비밀도 많은 외교관이었다. 왼쪽 셋째는 중국 극작가협회 주석 샤옌(夏衍). [사진 김명호]

저우언라이는 유엔을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미국의 의도를 꿰뚫고 있었다. 미국과 15개국이 연합으로 총회에 의안을 상정했다. 당시 유엔은 미국의 입김이 강했다. 12월 10일 의안이 통과되자 함마슐드가 3통의 전문을 연달아 저우에게 보냈다. 내용은 동일했다. “중국을 방문하고 싶다.” 16일, 중국도 2통의 답전을 보냈다. 한 통은 간첩사건에 대한 중국 측의 입장 설명이었다. 다른 한 통은 초청장이나 다름없었다. “우리는 평화와 국제사회에 만연된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우리의 수도 베이징에서 귀하를 접대하며, 중국의 평화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싶다.”

1955년 새해 벽두, 함마슐드가 베이징에 도착했다.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저우언라이와 네 차례 회담을 가졌다. 저우는 완강했다. “중국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다. 미국 간첩 처리에 관한 유엔 결의안을 수용할 수 없다.” 함마슐드는 유엔헌장까지 거론하며 미국을 변호해도 저우는 담벼락이었다. 구렁이 담 넘어가는 것 같은 공동성명을 냈다. “우리의 회담은 유익했다. 긴장 완화를 위해 계속 접촉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함마슐드가 베이징을 떠나기 전, 중국 측이 미국 간첩들의 생활을 찍은 사진을 건넸다. “미국의 가족들에게 전해주기 바란다.” 미국 정부는 저우에게 감사편지 보내라고 가족들을 독려했다. 중국은 중국적십자회 명의로 답신을 보냈다. “가족을 만나기 위해 중국에 올 수 있다면, 중국적십자회는 귀하를 도울 준비가 되어있다.” 유엔을 동원해 중국을 압박하려는 미국의 시도는 불발됐다. 직접 접촉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왔다.

1955년 1월 5일, 중난하이에서 함마슐드와 건배하는 저우언라이. [사진 김명호]

1955년 1월 5일, 중난하이에서 함마슐드와 건배하는 저우언라이. [사진 김명호]

1955년 4월 18일, 인도네시아 반둥에 아시아·아프리카 지역 29개국 수뇌가 집결했다. 1주일간 평화수호와 민족독립 쟁취, 민족경제 발전 등 공동의 관심사를 놓고 토론했다. 목적은 경제·문화 교류와 미국과 소련의 신식민주의(新植民主義) 억제였다. 네루, 수카르노, 낫셀 등이 명연기를 펼쳤지만, 주연은 중국(중화인민공화국) 대표단 단장 저우언라이였다. “구동존이(求同存異), 다른 점은 인정하고, 같은 것을 찾기 위해 노력하자”며 철 빗장을 활짝 열었다. 반공 국가들도 안심시켰다. “구존동이를 위해 미국과의 협상도 마다하지 않겠다.” 회의 기간 중국은 미국에 성의를 보였다. 간첩 용의자 4명과 구금 중인 미군 전투기 조종사를 석방할 용의가 있다고 선언했다.

미국의 반응도 적극적이었다. 반둥회의 종결 3일 후, 국무장관 덜레스가 기자 간담회를 열었다. “중국과의 담판을 배척할 이유가 없다”며 단서를 달았다. “대만도 참가해야 한다. 담판이 신중국을 승인하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한 발 더 나갔다. “담판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가 강화되기를 바란다.” 국무부가 여론을 분석했다. “저우언라이의 제의와 미국의 적극적인 반응으로 평화에 대한 희망이 다시 일어나기를 다들 고대한다.” 영국과 인도가 미·중 양국의 만남을 주선하겠다고 나섰다.

영국·인도, 미·중 만남 주선

문혁 시절 홍위병 완장 찬 미국 기자와 환담하는 마오쩌둥. [사진 김명호]

문혁 시절 홍위병 완장 찬 미국 기자와 환담하는 마오쩌둥. [사진 김명호]

저우는 영국과 인도 측에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우리는 미국과 담판을 원한다. 국민당과도 담판을 하고 싶다. 두 가지 담판은 연관이 있지만 성질은 판이하다. 전자는 국제성 담판이다. 미국의 간섭을 포기시키는 것이 담판 목적이다. 미국은 대만과 대만해협에 있는 무장병력을 철수해야 한다. 후자는 내정성(內政性) 담판이다. 중국 중앙정부와 대만에 있는 국민당 집단 간의 종전과 평화통일 문제를 놓고 담판을 진행해야 한다. 대만해방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평화적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 방식이다. 가능하다면 우리는 평화적으로 대만을 해방시키고 싶다. ” 부부관계를 예로 들었다. “국가 대사도 가정일과 다를 바 없다. 이혼하기도 어렵지만, 다시 결합하기는 더 어렵다. 재결합에 성공한 후 벌어질 일은 겪어본 사람이 아니면 모른다.”

영국은 중국의 태도를 미국에 전달했다. 미국 정부도 영국을 통해 중국에 제의했다. “중·미 쌍방의 대사급 대표가 제네바에서 회담을 거행하자.” 미국의 목적은 억류자를 포함한 교민의 안전한 귀국이었다. 중국이 동의하자 성명을 발표했다. 찬성이 대부분이었지만 중국 승인은 반대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마오쩌둥이 회담 대표로 폴란드 대사 왕빙난(王炳南·왕병남)을 낙점했다. 미국은 체코슬로바키아 대사 요한슨을 내세웠다.

회담에 임하는 미국 정부의 속내는 복잡했다. 어쩔 수 없이 응한 회담이었다. 성과를 기대하지 않았다. 중국의 영향력 확대도 우려했다. 회담대표 요한슨이 국무장관 덜레스에게 기간이 얼마나 소요될지 물었다. 덜레스는 “길어야 3개월”이라며 낯을 찡그렸다. 15년을 끌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곡절이 많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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