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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위스키 딱 두잔만 마시고 가는 전지현 닮은 그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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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143)

어슴푸레 찾아오는 저녁이 있다. 선명한 건물 불빛과 헤드라이트는 온데간데없고, 낮의 볕이 만들어낸 잔상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저녁. 유난히 밝았던 날일수록 이 현상은 더 심해져, 누군가는 밤늦도록 잠을 설친다. 지나간 날을 못 놓아주는 건 다가올 날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지만, 불분명한 밤을 버텨낼 힘이기도 하다.

이런 날에만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 누가 보더라도 첫눈에 반할 만한 그녀. 말이 없을 땐 고드름처럼 차갑게 느껴지지만, 말을 섞다 보면 군고구마의 온기 같은 게 느껴진다. 큰 눈망울과 오똑한 코, 그리고 미소 지을 때 진가를 발휘하는 도톰한 입술. 자리에 함께 있던 손님 한 명이 전지현을 닮았다며 극찬했던 분위기까지. 연한 베이지 코트에 롱부츠를 맞춘 그녀의 곁엔 늘 남자가 따랐으리라.

“오랜만이에요. 오늘은 밤이 밤 같지 않네요.”
“늘 이런 밤에만 오셨죠.”
“이런 밤? 그게 뭔데요?”
“여기 있는 위스키 맛이 모두 다르듯, 모든 손님의 밤은 제겐 다른 의미입니다.”

그녀에게 할당된 위스키는 딱 두 잔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석 잔을 마신 적이 없다. 물론 한 잔만 마신 적도.

첫인상이 좋지 않은 위스키라도 시간이 지나면 맛과 향이 변한다. 변한 맛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기회를 갖는 셈이다. [사진 pixabay]

첫인상이 좋지 않은 위스키라도 시간이 지나면 맛과 향이 변한다. 변한 맛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기회를 갖는 셈이다. [사진 pixabay]

“오늘은 어떤 위스키로 하시겠습니까?”
“음…. 모처럼이니까 맛있는 거 마시고 싶어요. 전에 마셨던 그것만 아니면 돼요.”

그녀가 전에 마신 그것. 얼마나 맘에 안 들었으면, 맛본 위스키 이름은 다 기억하는 그녀가 이름도 모르고 있을까. 하지만 내가 오늘 그녀에게 줄 위스키는 그것이다.

“아니, 그걸 왜 꺼내주세요? 저 그거 싫은데….”

그녀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짓는 거로 대답을 대신한다. 위스키는 지거를 통해 유리병에서 쇠붙이로, 다시 유리잔으로 옮겨간다. 그녀는 왜 이러냐는 표정으로 잔을 들어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신다.

“어? 이게 아닌데….”

분명 6개월 전쯤 그녀가 마신 그 위스키다. 다 팔려서 병이 바뀐 것도 아니다. 전체의 3분의 2쯤 남아있는 그것.

“오늘은 정말 맛있네요…. 왜 이렇죠? 정말 같은 위스키 맞아요?”
“그럼요. 저번에 드셨던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위스키가 변하듯 사람도 변한다. 변한 모습에 실망하기도 기대하기도 하지만 사랑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사진 pixabay]

위스키가 변하듯 사람도 변한다. 변한 모습에 실망하기도 기대하기도 하지만 사랑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사진 pixabay]

첫인상이 좋지 않은 위스키라도 시간이 지나면 맛과 향이 변한다. 물론, 변한 맛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기회를 갖는 셈이다. 위스키를 다 비운 그녀가 이번엔 자기 이야기로 잔을 채우기 시작한다.

“요즘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요, 처음엔 좋기만 했는데 갈수록 안 좋은 점이 보이는 거 같아요. 그래서 자꾸만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되길 바라고….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거 같아요.”

이번엔 대답 대신 위스키 한 잔. 영업 시작 전에 깨끗이 닦은 새 잔에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위스키를 한 잔 내준다.

“이번엔 제가 좋아하는 위스키네요.”

그녀가 물을 마신 뒤,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향을 맡고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신다.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잔을 내려놓고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거, 이상해요. 분명 가장 좋아하는 위스키인데 왜 오늘은 맛이 이럴까요?”
“이 위스키는 분명 손님이 가장 좋아하는 위스키입니다. 하지만 보틀을 오픈하고 시간이 지나면 맛이 이렇게 변하기도 하죠. 앞서 마신 위스키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맛을 봤을 땐 싫었지만, 오늘은 맛있게 느껴집니다. 시간이 지나며 맛도 향도 변한 거죠.”
“이렇게까지….”

위스키든 사람이든 변한 모습에는 적응이 필요하다. 한 모금 다시 마셔본다면 예전 좋아했던 그 맛이 느껴질지도 모른다. [사진 pixabay]

위스키든 사람이든 변한 모습에는 적응이 필요하다. 한 모금 다시 마셔본다면 예전 좋아했던 그 맛이 느껴질지도 모른다. [사진 pixabay]

“위스키가 변하듯 사람도 변합니다. 오늘 밤 집에서 마주 앉는 부모는 내가 태어났을 때의 부모와 다르죠. 완벽해 보이던 부모의 모습에 실망이 쌓이기도 하고, 원망스럽던 부모의 모습에 연민이 쌓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변한 모습에 실망하기도, 기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변치 않는 건, 그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변한 모습에 약간의 적응이 필요할 뿐이죠. 다시 한 모금 마셔보실래요? 예전의 좋아했던 그 맛이 느껴지실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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