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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엄격했던 고교 은사 떠오르는 ‘티스푼 위스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141)

10시가 좀 넘어서야 처음 울리는 종소리. 단정한 수트 차림의 젊은 남자가 홍조를 띠고 바 안으로 들어온다. 어디선가 한잔하고 그 여흥을 이어가기 위해 온 걸까? 목이 말랐는지 롱글라스에 물을 한 잔 따라주자 벌컥 다 마셔버린다.

“물맛이 좋네요. 죄송하지만 한 잔만 더 주실래요?”

다시 물을 담아 내주자 이번에도 원샷. 술을 꽤나 마셨나보다.

“감사합니다. 드디어 왔네요, 제가 여길.”

그는 얼마 전까지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이었다.

철저한 시간 관념은 모든 사람에게 신뢰를 심어준다. [사진 pixabay]

철저한 시간 관념은 모든 사람에게 신뢰를 심어준다. [사진 pixabay]

“정말 영어는 싫어하는데 모든 회사가 영어점수를 원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성실함이 무기인 그는 영어학원과 취업 스터디 모두 단 한 번의 지각도 없었다. 이 성실함은 학생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비록 성적은 안 좋을지라도 그의 출결에는 아무런 흠집이 없었을 것이다.

“매우 성실한 분이군요. 개근상은 모두 가지고 계시겠네요?”

“아니요. 고2때 한 번 놓쳤어요.”

당시 온라인 게임에 푹 빠진 그는 새벽 4시까지 게임을 하곤 했다. 잠을 안 자고 학교에 가곤 했는데, 어는 날 깜빡 잠이 들어 일어나보니 벌써 8시. 부랴부랴 학교에 갔지만 지각. 마침 담임 선생님이 조례를 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의 출석표에 처음 새겨진 펜 자국. 그는 조례가 끝나자마자 선생님께 달려가 말했다.

“9시 되기 전에 왔으니까 봐주시면 안 될까요? 다음부턴 절대 지각하지 않겠습니다.”

“무슨 소리야? 1초가 늦어도 지각은 지각이다. 이건 지워줄 수 없다. 곧 수업 시작하니까 자리로 돌아가.”

그 학기가 끝나고 받아 든 성적표에는 ‘지각1회’라는 글자가 박혀있었다. 문서상의 인생에 첫 상처가 생긴 것 같았다. 절대 아물지 않고 평생 남아있을 상처.

“너무 억울했죠. 사실 선생님이 조례에 조금만 늦게 들어오셨어도 지각은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이 일은 오히려 그에게 약이 됐다. 철저한 시간관념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줬다. 게으름을 막아줬다.

“어쩌면 이렇게 취업을 한 것도 그 선생님 덕분일지 몰라요. ‘성실’이란 단어에 예외는 있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까요. 아, 제 말이 너무 많았죠? 위스키 한 잔 주실래요? 취업하면 꼭 여기 와서 한 잔 마시고 싶었거든요.”

싱글몰트 글렌모렌지에 다른 위스키를 섞은 것이 웨스트포트다. 글렌모렌지는 오피셜 보틀 외의 보틀에 글렌모렌지란 이름을 쓸 수 없게 했기 때문이다. [사진 pixabay]

싱글몰트 글렌모렌지에 다른 위스키를 섞은 것이 웨스트포트다. 글렌모렌지는 오피셜 보틀 외의 보틀에 글렌모렌지란 이름을 쓸 수 없게 했기 때문이다. [사진 pixabay]

백바에서 위스키를 한 병 꺼내 글렌캐런에 담아 그에게 건넸다.

“웨스트포트라는 위스키입니다.”

“웨스트포트요? 처음 들어보네요…. 아버지가 위스키를 좋아해서 싱글몰트도 꽤 접해봤는데.”

그가 입을 잔에 대고 한 모금 마셔본다. 말한 대로 위스키 경험이 꽤 있는지 가만히 입 안에서 위스키를 굴리다가 삼킨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하다 물을 한 방울 떨어트려 좀 더 맛을 본다.

“이거, 왠지 익숙한 맛이 나는데요? 많이 마셔본 거 같은데…. 웨스트포트라는 증류소가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그럼 이 위스키는 뭐죠? 블렌디드 몰트라고 쓰여 있는 걸 보니 여러 싱글몰트를 섞은 건가요?”

“아니요, 딱 두 종류의 싱글몰트를 섞었는데, 하나는 뭔지 알려졌지만 다른 하나는 비밀에 부쳐져 있습니다.”

“아, 정말 궁금하네요. 좀 알려주세요!”

“싱글몰트 글렌모렌지에 다른 위스키를 섞은 것이 바로 이 웨스트포트입니다. 글렌모렌지는 오피셜 보틀 외의 보틀에 글렌모렌지란 이름을 쓸 수 없게 했죠. 대신 가끔 웨스트포트란 이름으로 독립병입 위스키가 출시되곤 합니다. 여기엔 글렌모렌지가 아닌 다른 증류소의 위스키가 조금 들어갑니다. 때로는 티스푼 하나 정도의 양이 들어간다고 해서 ‘티스푼 위스키’라고도 불리죠. 어떤 이는 글렌모레이를 한 스푼 넣는다고도 합니다.”

“오피셜 보틀 외에는 ‘글렌모렌지’라는 이름을 내주기 싫다라…. 왠지 고집쟁이 영감님 같네요.”

“왠지 손님의 고등학교 선생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 위스키가 떠오르더라고요. 선생님의 엄격한 규칙으로 손님 인생에 작은 생채기가 생겼을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게 먼 미래를 내다본 선생님의 깊은 사랑이지 않을까요? 고집스럽게 글렌모렌지를 지켜나가지만, 때로는 ‘티스푼’이라는 재미있는 방식으로 독립병입 위스키가 출시되는 글렌모렌지 증류소처럼. 한 증류소에서 나온 모든 위스키가 글렌모렌지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웨스트포트 위스키는 글렌모렌지가 아닌 다른 증류소의 위스키가 조금 들어간다. 티스푼 하나 정도의 양이 들어간다고 해서 ‘티스푼 위스키’라고도 불린다. [사진 pixabay]

웨스트포트 위스키는 글렌모렌지가 아닌 다른 증류소의 위스키가 조금 들어간다. 티스푼 하나 정도의 양이 들어간다고 해서 ‘티스푼 위스키’라고도 불린다.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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