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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살부터 72살 노인까지 성폭행" 내전 1년, 지옥 변한 이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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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의 여지 없이 사태가 점점 악화하고 있다. 솔직히 지금의 상황은 우리도 경악스럽다.”

지난달 20일(현지시각) 에티오피아 북부 티그라이의 주도(州都) 메켈레 공습현장에서 검은 연기와 불길이 치솟는 가운데 사람들이 달리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달 20일(현지시각) 에티오피아 북부 티그라이의 주도(州都) 메켈레 공습현장에서 검은 연기와 불길이 치솟는 가운데 사람들이 달리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의 동아프리카 특사 제프리 펠트먼이 지난 2일(현지시간) 에티오피아의 현 상황을 묻는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에티오피아 내 티그라이 반군이 지방 거점 도시를 점령하고 수도까지 위협하면서 에티오피아 정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에 미 당국은 자국민에게 “당장 에피오피아를 떠날 것”을 권고하고 있다.

AP·블룸버그 통신 등에 따르면 이날 에티오피아 정부는 “반군이 심각하고 임박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며 6개월간의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지난 2018년 아비 아머드 총리의 취임을 앞두고 비상사태를 선포한 지 약 3년 만이다.

에티오피아, 국가비상사태 선포.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에티오피아, 국가비상사태 선포.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노벨 평화상 출신 총리, “어떠한 무기라도…”

이에 따라 주민들에겐 통행금지령이 내려졌고, 반군과 연관성이 의심되는 사람은 무기한 구금될 수 있다. 비상사태를 반대하는 표현은 금지되고, 시민에 대한 군사훈련과 각종 언론 면허의 정지도 가능하다. 또 수도 아디스아바바 시 당국은 시민들에게 이틀 안으로 보유한 무기를 신고하고 무장하거나, 사용이 어려울 경우 정부나 친척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2019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아비 총리는 지난달 31일 “반군에 맞서 모든 시민이 어떠한 무기라도 들고 싸워달라”고 요구한 것에 이어, 이날 트위터를 통해 “비상사태는 고난의 기간을 단축하기 위한 방법이다. 시대의 요구에 응해 달라”고 당부했다.

에티오피아 북부 티그라이주 아굴라에서 주민들이 구호식량으로 도착한 콩을 두고 언쟁을 벌이고 있다. [AP=연합뉴스]

에티오피아 북부 티그라이주 아굴라에서 주민들이 구호식량으로 도착한 콩을 두고 언쟁을 벌이고 있다. [AP=연합뉴스]

‘부족 간 대립해소’ 추진하며 수년 째 갈등

아프리카 내 인구 2위(약 1억1800만명) 국가이자, 아프리카로 들어오는 항공기들의 허브(hub) 역할을 담당했던 에티오피아에 비상사태가 선포된 건 반군 티그라이인민해방전선(TPLF)이 급속히 영향력을 확장하면서다.

에티오피아는 지난해 11월부터 북부 티그라이주(州)의 통치세력인 TPLF와 내전 중이다. 이들은 개전 1년 만에 인근 아파르, 암하라주까지 급속히 세력을 넓혔고, 최근에는 수도 아디스아바바와 약 380㎞ 떨어진 데시와 콤볼차까지 점령했다. 이 두 도시는 수도로 통하는 직행 고속도로가 연결된 전략적 요충지다.

약 600만 명으로 추산되는 티그라이족은 에티오피아 인구의 6%를 차지하는 소수민족이다. 그럼에도 에티오피아 전체 군사력의 절반 수준인 25만의 무장병력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 2017년까지 부족들의 연정 체제로 운영되던 에티오피아에서 27년간 중앙정부를 장악하며 힘을 키웠기 때문이다.

지난달 4일(현지시간)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행진하는 에티오피아 정부군. [AFP=연합뉴스]

지난달 4일(현지시간)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행진하는 에티오피아 정부군. [AFP=연합뉴스]

아비 총리를 배출한 에티오피아 내 최대 부족인 오로모족(전체 인구의 34%)의 ‘오로모해방군(OLA)’도 TPLF와 동맹을 맺고, 현 정권에 반기를 들고 있다. 게타 츄레다 OLA 대변인은 이날 “더 이상의 유혈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내전을 끝내겠다”며 “수주 안에 통일된 군사 전략을 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AP통신은 “이제 전투는 곧 오로모족의 지역에도 도달하게 될 것”이라며 “오로모족은 아비를 총리로 추대했지만, 이후 총리가 종족 지도자들을 투옥시키며 불만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아비 총리는 지난 2018년 취임 직후 고질적인 부족 간 대립 해소를 위해 지역 정당 연정을 해체하고, 단일정당인 번영당 체제 수립을 시도했다. 그러나 TPLF가 번영당 가입을 거부하고 자체 노선을 선택해 아비 총리는 내각의 모든 TPLF 장관을 해임했다. 이후 에티오피아 정부가 코로나19 유행을 이유로 총선 연기 방침을 세우자 이에 반발한 TPLF는 지난해 9월 자체 선거를 치렀다. 두 달 뒤, 정부는 TPLF가 정부군을 공격했다며 티그라이 지역에 전기와 식량 등을 끊고 진압 작전에 나섰다.

2019년 12월 노벨평화상 100번째 수상자로 선정된 아비 아머드 에티오피아 총리. [로이터=연합뉴스]

2019년 12월 노벨평화상 100번째 수상자로 선정된 아비 아머드 에티오피아 총리. [로이터=연합뉴스]

김성수 한양대 유럽아프리카연구소장은 “아비 총리가 집권을 시작할 당시에는 포용적인 정책을 펼쳤지만, 지난 2018년 사흘레-워크 쥬드(71)가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는 등 급진적인 변화에 종족 지도자들의 반발 기조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기아·성폭행·민간인 학살 이어져

문제는 내전으로 에티오피아 정부군이 티그라이로 향하는 국제 구호물자를 봉쇄하면서 기아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AP통신에 따르면 지난달 16일 내전으로 시내에서 음식 구할 수 없게 된 한 젊은 엄마는 아이들을 먹일 수 없는 현실을 비관해 극단적 선택을 했다. 현재 티그라이 지역 주민 600만 명 중 40만 명 이상이 식량 안보 단계 분류에서 최고 수위인 ‘재앙’(IPC5) 단계에 처해있다.

지난 10월 4일 티그라이 한 병원에서 영양실조 등으로 치료받는 4세 여아 모습. [AP=연합뉴스]

지난 10월 4일 티그라이 한 병원에서 영양실조 등으로 치료받는 4세 여아 모습. [AP=연합뉴스]

또 민간인 학살과 조직적 성폭행까지 이어지며 감정의 골은 더 깊어지고 있다. 티그라이주에선 지난 2월부터 4월 사이에만 1288건의 성폭력 사건이 기록됐다. 이 중 대부분은 에티오피아 정부군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지난 5월 한 수녀는 영국 일간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성폭행은 8살 아이부터 72살 노인까지 모두가 대상이 되고 있으며, 매일 일어나고 있다”며 “정부군은 공공장소이든 남편의 눈앞이든 신경 쓰지 않는다”고 전했다.

지난 4월 벨기에 겐트대학교의 현지 연구팀은 정부군과 반군의 전투가 벌어진 이후 150차례에 걸쳐 민간인 1900명이 학살됐다고 발표했다.

에티오피아 정부군이 티그레이 지방의 비무장 민간인 남성들을 학살하기 직전 모습. [CNN]

에티오피아 정부군이 티그레이 지방의 비무장 민간인 남성들을 학살하기 직전 모습. [CNN]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2일 에티오피아 내 적대행위를 즉각 중단할 것을 호소했다. 유엔은 ▶긴급 지원 조달을 위한 인도주의적 접근 허용 ▶사태 해결을 위한 국가 차원의 포괄적 대화 ▶평화와 안정을 위한 토대 구축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 정부도 TPLF가 수도를 향해선 안된다는 입장을 내는 동시에, 현 정권을 향해서도 “내전이 지속될 경우 에티오피아에 대한 관세 혜택을 보류하겠다”고 밝힌 상황이다.

다만 펠트먼 특사는 “양측은 휴전 협상이나 회담 모두에 전혀 가까워(anywhere near) 보이지 않는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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