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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인간이 아니었다"…성폭행으로 얼룩진 에티오피아 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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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내면 죽이겠다고 했다. 그들은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아니 한 명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잘 모르겠다.”

“3명의 정부군이 내 아이 앞에서 나를 성폭행했다. 그들은 먹잇감을 본 하이에나처럼 몰려들었다.”

지난해 에티오피아 북부 티그레이 주(州)에서 발생한 내전의 가장 큰 피해자는 소녀들을 포함한 여성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11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전날 세계인권기구인 국제 앰네스티는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6월까지 이어진 내전에서 티그레이 여성들이 겪은 참상을 담은 보고서를 발표했다.

전투 의지 꺾으려 조직적·집단적 성폭행 #8세 여아부터 72세 노인까지 모두가 대상 #가까스로 휴전했지만 40만명 기아 상태 #민간인 학살도 1900명 이상 보고돼

2020년 11월 22일 에티오피아 국경을 넘은 한 티그레이 부족 여성이 아이를 업고 인접국인 수단 카 살라 주 동부 함다 예트 마을에 서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2020년 11월 22일 에티오피아 국경을 넘은 한 티그레이 부족 여성이 아이를 업고 인접국인 수단 카 살라 주 동부 함다 예트 마을에 서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보고서에는 성폭행 피해 여성들과 그들을 치료한 보건·의료 종사자 63명의 인터뷰가 담겼다. 이에 따르면 인터뷰 여성 10여 명은 여러 남성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며 수 주 동안 감금됐으며, 자신의 아이 등 가족 앞에서 성폭행을 당한 여성이 12명, 성폭행 범죄가 일어날 당시 임신 중이던 여성도 5명이나 있었다.  

앰네스티는 “인터뷰에 참여한 여성의 대부분이 대외적으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며 “이 수치는 실제 범죄 발생 건의 극히 일부분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앰네스티는 “성폭행은 티그레이 부족을 모욕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며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형태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티그레이 주에선 지난 2월부터 4월 사이에만 1288건의 성폭력 사건이 기록됐다. 범행을 저지른 이들의 대다수는 에티오피아 정부군이었다.

지난 4월 에티오피아 정부군이 티그레이 지방의 비무장 민간인 남성들을 학살하기 직전 모습. 영상 속 군인들은 “실탄을 낭비하지 말고 한사람당 한 발씩 최소한만 쓰라”고 말했다. [CNN]

지난 4월 에티오피아 정부군이 티그레이 지방의 비무장 민간인 남성들을 학살하기 직전 모습. 영상 속 군인들은 “실탄을 낭비하지 말고 한사람당 한 발씩 최소한만 쓰라”고 말했다. [CNN]

이에 대해 가디언은 “집단 성폭행이 전쟁의 무기로 쓰였다”며 “일부 여성들의 신체 중요 부위에는 손톱, 자갈이 박혀 있는 등 성고문의 흔적도 있었다”고 전했다.

아그네스 캘러마드 국제앰네스티 사무총장은 “생존자의 대다수가 정서불안 등의 후유증을 앓고 있고, 일부는 HIV 양성 반응을 보이고 있다”며 “티그레이 지역에서 발생한 집단적인 성범죄는 인간성이 의심될 만큼 충격적이다”고 비난했다.

에티오피아 티그레이 지역 여성들이 분쟁으로 피난을 온 이웃 나라 수단 난민 캠프에서 요리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에티오피아 티그레이 지역 여성들이 분쟁으로 피난을 온 이웃 나라 수단 난민 캠프에서 요리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앞서 티그레이 내전이 휴전에 들어가기 전인 지난 5월 한 수녀는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성폭행은 8살 아이부터 72살 노인까지 모두가 대상이 되고 있으며, 매일 일어나고 있다”며 “정부군은 공공장소든 남편의 눈앞이든 신경 쓰지 않는다”고 전했다.

지난 6월 에티오피아 중앙 정부 측이 일시 휴전을 선포한 이후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는 에티오피아 정부 측과 티그레이에서 일어난 인권 탄압 사태에 대한 공동조사를 진행 중이다. 다만 앰네스티 측은 에티오피아 정부가 티그레이 지역에 대한 인권 조사관의 접근을 막고 있어 정확한 사태 파악이 힘든 상황이라고 전했다. 올해 초 에티오피아 정부는 성폭행 등 혐의로 군인 3명에 대해서만 유죄 판결을 내리고 25명을 기소한 상황이다.

2019년 12월 노벨평화상 100번째 수상자로 선정된 아비 아머드 에티오피아 총리. [로이터=연합뉴스]

2019년 12월 노벨평화상 100번째 수상자로 선정된 아비 아머드 에티오피아 총리. [로이터=연합뉴스]

티그레이 분쟁은 지난해 9월 티그레이 주를 사실상 통치하는 티그레이인민해방전선(TPLF)이 중앙정부가 코로나19 유행으로 총선을 연기한 것에 반발해 일어났다. 아비 아머드 현 에티오피아 총리의 집권이 연장된다는 이유였다. 이후 TPLF는 자체 선거 실시를 결정했고, 이에 아비 총리가 11월 티그레이 지방에 군대를 파견하면서 내전이 시작됐다. 아비 총리는 이웃 국가인 에리트레아와의 분쟁을 20년 만에 끝낸 공을 인정받아 2019년 100번째 노벨평화상을 받은 인물이다.

내전 발발로 현재 티그레이 지역 주민 600만 명 중 40만 명 이상이 식량 안보 단계 분류에서 최고 수위인 ‘재앙’(IPC5) 단계에 처해있다. 지난 4월 벨기에 겐트대학교의 현지 연구팀은 정부군과 반군의 전투가 벌어진 이후 150차례에 걸쳐 민간인 1900명이 학살됐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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