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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정호의 시시각각

나라 지키는 오징어게임과 그 적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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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한국의 소프트 파워는 한·미관계를 보다 굳건히 하는 힘을 발휘한다. 사진은 넷플릭스 사상 최고의 흥행을 기록한 오징어게임. 제공=넷틀릭스

한국의 소프트 파워는 한·미관계를 보다 굳건히 하는 힘을 발휘한다. 사진은 넷플릭스 사상 최고의 흥행을 기록한 오징어게임. 제공=넷틀릭스

온 세상이 한류로 야단이다. BTS, '기생충'에 이어 '오징어 게임'이 대박을 치더니 최근 새 국내 드라마 '마이 네임'까지 넷플릭스 TV 부문 세계 3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나이, "한류가 한국 안보에 도움 줘" #주한미군 철수 무산에 크게 기여 #정치가 쓸데없는 간섭하지 말아야

이런 가운데 국제정치학계의 석학인 조셉 나이 하버드대 명예교수가 지난 5일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세미나에서 한국의 소프트 파워(Soft Power)에 관해 주제 발표를 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소프트 파워란 개념을 창시한 인물로 노벨상에 국제정치학 분야가 있다면 진작 받고도 남을 거물이다. 소프트 파워는 군사력·경제력과는 별도로 한 국가가 갖는 매력·신뢰성 등에 의해 발휘되는 힘을 뜻한다. 주목해야 할 나이의 주장은 한국의 소프트 파워가 한·미 관계와 같은 전통적 국제 관계에도 큰 영향을 준다는 거였다. 그가 든 사례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이 추진했던 주한미군 정책이었다. 트럼프는 2019년 한국이 미국 안보에 무임승차한다며 군사비를 더 부담시키려 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이 돈을 더 내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빼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이런 트럼프의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한국에 대한 미국인들의 호감이 커지면서 여기에 영향 받은 미 의회가 트럼프의 정책에 호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갤럽 조사 결과 "한국에 호감을 느낀다"고 응답한 미국인의 비율은 2003년 46%에서 2018년 77%로 15년 동안 31%포인트나 늘었다. '오징어 게임' 같은 한류가 나라를 지키는 셈이다.

이와 관련해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이 있다. 한류 덕에 한국에 대한 미국인의 호감이 확 늘었지만, 여전히 이웃 나라 일본의 상대는 못 된다는 점이다. 같은 2018년 2월 갤럽 조사에서 "일본을 좋아한다"고 응답한 미국인은 87%에 달해 한국보다 10%포인트나 앞섰다. BTS, '기생충' '오징어 게임' 없이도 일본은 미국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런 성공은 오랜 기간에 걸친 일본의 국제사회에 대한 기여와 집중적인 대미 공공외교 덕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물론 실망할 건 없다. 지금처럼 한류가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한국에 대한 호감은 일본을 넘어설 수 있고, 이것이 소프트 파워로 작용해 우리 안보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게 확실하다.
다만 한 가지 유념할 점은 한류의 발목을 잡는 훼방꾼이 설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거다. 장애물은 다름 아닌 정치권의 쓸데없는 간섭이다. 외국 언론은 획기적인 한류의 성장 비결 중 하나로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꼽는다. 실제로 당국은 한류 육성을 위해 여러모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게다가 방향까지 잘 잡았다. 지난해 7월 박양우 문체부 장관은 '신한류 진흥정책'을 발표하며 이렇게 천명한다. 지금 갈림길에 선 한류를 제대로 육성하려면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정부의 지혜로운 정책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얼마 전 청와대가 BTS를 대했던 행태를 보면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참으로 공허하게 들린다. 지난달 문재인 대통령 부부는 뉴욕 유엔 총회에 참석하며 BTS를 동반했다. BTS는 뉴욕 일정 첫날, 문 대통령의 ‘지속 가능 발전 목표(SDG) 모멘트’ 개회 연설에 찬조 출연하고 유엔 측 인터뷰에 응했다. 그러곤 바로 김정숙 여사의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참관에 동행했다. 둘째 날에는 문 대통령의 ABC 방송 인터뷰에 동참했고, 셋째 날엔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뉴욕 한국문화원 행사에 참석했다. 출입국 일정까지 보태면 족히 4~5일을 정치권의 부름에 쓴 것이다.
고려대 연구진에 따르면 3일에 걸친 BTS의 2019년 7월 서울 공연의 경제적 효과는 9200여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BTS가 문 대통령 수행 대신 서울에서 공연했다면 국가적으로 엄청난 이익을 거뒀을 게 분명하다. 그러니 정치권은 한류 스타들을 오라, 가라 하지 말기 바란다. 그게 한류를 육성하고 우리 국방을 튼튼히 하는 지름길이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