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더오래]책이 차려주는 풍성한 밥상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홍미옥의 모바일 그림 세상(86)

“판술이 술잔에 술을 붓는다. 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는데 잘 차린 점심상이었다. 노릿 노릿하게 구워진 조기, 산뜻하게 무쳐 낸 고사리, 시금치, 콩나물, 마른 가자미는 실고추를 발라 쪄 내었고 , 대구 아가미젓엔 반듯반듯한 무 조각, 굴젓 그리고 조갯살을 넣어 갈쭉하게 끓인 된장국, 그밖에 생선전, 햇김치, 계란 찐 것, 모두 먹음직스럽다.”

소설 『토지』의 한 대목이다. 숱한 고난과 역경을 거쳐 노년에 겨우 한숨 돌리게 된 촌로 영팔네가 조카 같은 홍이를 위해 차려 낸 점심상이다. 사는 형편에 비해 거한 상차림이지만 “차린 게 없어서 어떡하냐”는 말도 빼놓지 않는 정이 듬뿍 담긴 밥상이다. 대하소설 『토지』엔 유독 나의 식욕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 곧잘 등장한다. 짙은 정이 듬뿍 담겨있는, 소박하지만 맛깔난 음식들 그러니까 책이 차려주는 밥상인 셈이다. 그것은 가끔 현실의 배고픔까지도 느끼게 한다.

소설 『거미여인의 키스』와 마테차. 아이패드7. [그림 홍미옥]

소설 『거미여인의 키스』와 마테차. 아이패드7. [그림 홍미옥]

고독한 마테차와 거미여인의 키스

바야흐로 천고마비의 계절이다. 그래선가? 책을 읽다 보면 가끔 나도 모르게 배고픔을 느낄 때가 있다. 책을 읽다 보면 가끔 나도 모르게 배고픔을 느낄 때가 있다. 솔직히 계절에 상관없이 그런 편이긴 하다. 하지만 내가 끌리는 건 희한한 음식도 그렇다고 대갓집 양반이나 유럽의 귀족이 먹었음 직한 고급 음식이 아니다. 참기름에 조물조물 무친 콩나물, 거피한 콩가루를 묻힌 인절미, 설탕에 뭉근히 졸여낸 밤 등 맘만 먹으면 언제라도 맛볼 수 있는 음식이다.

몇십 년 전 그러니까 정말 오래전의 일이다. 남미 문학의 거장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에 ‘마테차’가 짧게 언급됐다. 그 밖의 보잘 것없는 먹거리(감옥이라는 특수성)가 많이 나오지만 주인공은 다음날 아침에 마실 뜨거운 마테차에 간절함을 담았다. 마시는 차라곤 커피나 홍차, 녹차 정도만 알고 있던 난 마테차의 맛이 궁금했다. 솔직히 처음 들어본 차 이름이었다. 무슨 맛일까? 남미의 뜨거운 맛일까? 궁금증은 더해갔다.

재밌게도 몇 년 후 TV 광고에서 ‘뜨거운 태양의 맛! 이라는 문구로 마테차가 요란하게 등장했다. 당시 인기 가도를 달리던 걸그룹의 리더는 구릿빛 피부를 자랑하며 뜨거운 태양 아래서 마테차를 마셨다. 막상 맛을 보니 특별할 것도 없는 맛이긴 했지만 『거미여인의 키스』가 주던 느낌을 떠올리기엔 충분했다.

감성으로 맛보며 읽는 책속 먹방

알렝 드 보통 『여행의 기술』과 기내식. 아이패드 프로. [그림 박영애]

알렝 드 보통 『여행의 기술』과 기내식. 아이패드 프로. [그림 박영애]

오래 전부터 소위 ‘먹방’이라 불리는 콘텐츠가 인기다. 라면 한 그릇을 먹을 뿐인데도 화면 속 모습은 어찌 그리 맛깔난지 모른다. 조그만 체구의 진행자가 믿을 수 없는 양의 음식을 순식간에 먹어치우는 모습에 대중은 열광했다. 그뿐인가, 부쩍 늘어난 혼밥족은 화면 속의 ‘먹방러’와 겸상하며 외로움을 나누기도 한다.

책을 읽다 보면 꼭 등장하는 먹거리가 있다. 때로는 이야기의 중심이 되기도 하고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이왕 천고마비의 계절이기도 하니 책 속 음식으로 한 상 거하게 차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잊고 있던 책도 다시 읽으면서 상상 속 만찬을 맛보는 것이다. 우선 처음에 언급한 토지의 정스러운 밥상을 맘껏 배불리 먹는다. 두 노인네의 정성이 절로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

곁들이는 음식이라면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에 나오는 돼지 간 볶음이 좋겠다. 피를 뽑고 난 후의 보양식이니 왜 아니 좋겠는가! 아버지의 눈물 어린 피의 대가이니 더 그렇다. 그래도 뭔가 헛헛하다면 박완서의 『미망』에 등장하는 개성식 조랭이떡국이 딱 좋을듯하다. 도도하고 기품 있는 개성음식이니 깔끔한 마무리가 될 것이 틀림없다.

이미 배가 부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여기서 끝은 아니다. 이젠 후식 차례다. 바람 부는 황량한 사막에 단비 같은 존재인 르 클레지오의 『사막』에 나오는 대추야자는 어떨까? 지독한 단맛에 저절로 몸서리가 쳐도 좋겠다.

마지막으론 라우라 에스키벨의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다. 때마침 10월이니 마법과도 같은 이야기 속 멕시코 주방의 크림 튀김을 맛보는 것도 좋겠다. 맙소사! 크림 튀김이라니, 어떤 맛일지 입에 넣기도 전에 스르르 사라지는 맛일지 궁금하기가 짝이 없다.

자, 한 상 그득히 차려 먹고 나니 마음도 감성도 한껏 불러온다. 식상한 표현이긴 해도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이 가을, 어딘가에 꽂혀있는 책으로 미식 여행을 떠나본다. 알랭 드 보통의『여행의 기술』을 펼치고 코로나 시대에 가장 먹고 싶은 음식으로 꼽히는 기내식을 상상하면서.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