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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네 멋'대로 진화하는 버스정류장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홍미옥의 모바일 그림 세상(85)

벌써 20여 년이 되어가지만, 여전히 ‘찐 팬’들의 사랑을 받는 드라마가 있다. 복수(양동근 분)와 경(이나영 분)의 청춘을 그린 MBC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가 그것이다. '사는 동안 살고 죽는 동안 죽어요, 살 때 죽어있지 말고 죽을 때 살아있지 마요’등등 수많은 명대사로 ‘드라마 폐인’이란 신조어를 만들어내기까지 했던 2002년 드라마였다.

그리고 그 스토리의 시작엔 버스정류장이 있었다. 두 주인공의 만남부터 20여 년의 시간이 흐르고도 여전히 기억되는 그곳에는 팬들의 안부가 끊이질 않는다. 주인공들의 안부를 묻는 빼곡한 메모장에서 드라마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비록 지금은 철거되었지만, 팬들의 마음속에 ‘네 멋 정류장’은 아직도 운행 중이다.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버스정류장 신. 아이패드. [그림 홍미옥]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버스정류장 신. 아이패드. [그림 홍미옥]

진화하는 버스정류장

추석 연휴 전 오랜만에 마장동 축산시장에 들렀다. 코로나가 훼방을 놓긴 했어도 최대의 명절을 앞두고 있어선지 시장은 분주했다. 한껏 쌓아 올린 한우 선물세트며 차례상에 올릴 음식 마련에 장바구니를 들고나온 사람들까지 말 그대로 시장 분위기 물씬했다. 축산시장 특성 대로 소·돼지의 온갖 부속물이 진열되고 한쪽에서는 그걸 손질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당연히 익숙지 않은 냄새도 풍겨왔고 몰려든 인파로 살짝 덥기까지 했다. 이런저런 일을 마치고 시장을 나왔다. 가을치곤 무더운 날씨 때문인지 어디에라도 잠깐 앉고 싶었다. 조금 걸어가니 여느 곳과는 사뭇 다른 버스정류장이 보였다.

진화하는 버스정류장인 스마트쉼터. [사진 홍미옥]

진화하는 버스정류장인 스마트쉼터. [사진 홍미옥]

성동구의 스마트버스정류장은 세계의 주목을 받고있다. [사진 성동구청]

성동구의 스마트버스정류장은 세계의 주목을 받고있다. [사진 성동구청]

‘성동형 스마트쉼터’라고 쓰여 있는 이곳은 쉽게 말해 버스정류장이다. 앞서 말한 드라마 ‘네 멋’의 복수와 경이가 만나던 그런 정류장인 것이다. 그런데 뭔가 아주 다르다. 흔히 생각하는 버스정류장은 여름이면 더 더울 뿐 아니라 한겨울엔 그 추위에 발을 동동 굴려야 하는 곳이었다. 춥거나 더울수록 기다리는 버스가 더디게 오는 건 물론이다.

일단 들어가 봤다. 열화상 카메라가 온도를 자동으로 측정 후 문이 열리는 시스템이다. 맞다! 지금은 코로나 시대, 이런 환경도 필수이겠다. 내부는 여느 정류장과는 아주 다르다. 공기청정기와 에어컨(겨울엔 온풍기)이 부지런히 가동 중이다. 마치 길가의 작은 카페처럼 의자도, 와이파이도, 유무선 충전기기까지 갖추고 있다. 버스도착안내 전광판이 없었더라면 깜빡하고 속을 뻔할 정도였다.

알아보니 나만 모르고 있었나 보다. 이미 전 세계의 유수 언론에서 취재를 하고, 많은 호응을 일으켰다고 한다. 미국 뉴스위크지는 ‘한국의 새로운 버스정류장은 우리가 지금 공상과학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는 극찬을 했다. 기분 좋은 일이다. 그날 버스를 타진 않았지만, 우리 가족은 시원하고 쾌적한 정류장 쉼터에서 스마트한 휴식을 잠깐이나마 맛보았다.

먼지 날리던 시골의 정류장부터 미술전시장으로 변한 정류장까지

11월까지 44개의 버스정류장에선 〈같이,우리〉 展이 열리고 있다. [사진 홍미옥]

11월까지 44개의 버스정류장에선 〈같이,우리〉 展이 열리고 있다. [사진 홍미옥]

종로2가의 정류장에 전시중인 노세환 작가의 〈meltdown〉 시리즈. [사진 홍미옥]

종로2가의 정류장에 전시중인 노세환 작가의 〈meltdown〉 시리즈. [사진 홍미옥]

버스정류장의 변신은 오늘도 진화 중이다. 이번엔 갤러리로의 변신이다. 그동안은 온통 자극적인 광고가 차지하던 정류장의 게시판은 10~11월 두 달 동안 미술갤러리로 변신을 하고 나섰다. 서울시는 ‘같이, 우리: 안녕’ 전을 도봉미아로, 망우왕산로, 통일의주로, 종로 일대 44개 버스정류에서 열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천체사진작가인 권오철의 오로라 사진과 일러스트레이터 배성태의 위로의 그림이 있다. 내가 자주 가는 종로의 정류장에서도 반가운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노세환 작가의 〈멜트다운〉 시리즈 중 두 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작가 74명의 총 155점의 작품이 곳곳의 버스정류장에서 전시 중이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은 길어야 5분에서 10분쯤이다. 바로 내 곁으로 다가온 생활미술을 감상하기엔 충분한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 버스정류장은 드라마 속으로, 스마트한 첨단환경으로, 그리고 친근한 예술의 세계로 우릴 데려다줄 친구가 되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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