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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카공족’이 장악한 카페에서 그림의 꽃을 피우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홍미옥의 모바일 그림 세상(83)

고약한 코로나로 이젠 꿈같은 이야기가 돼버렸지만 파리를 여행하는 이들에겐 필수코스가 있다. 물론 루브르박물관이나 에펠탑은 기본 중의 기본이니 일단 제외다. 파리 생제르맹 데 프레 중심에 있는 문학 카페 두 곳이 바로 그곳인데, 이름만 들어도 ‘우와~’, ‘오~’하고 탄성을 지르게 되는 작가들이 단골로 드나들었다던 유명카페다.

당장 생각나는 이름만 읊어 봐도 카뮈, 사르트르, 보부아르, 생텍쥐페리, 헤밍웨이, 앙드레 말로 등등이니 말 다 했다. 그래선지 파리의 양대 문학 예술 카페 ‘레 되 마고’와 ‘르 플로르’엔 그들의 흔적을 찾는 여행자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어디 여기뿐이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카페는 차이콥스키와 푸시킨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고 하고, 도쿄 진보초 골목의 낡은 카페에는『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비롯해 하루키의 흔적도 어제처럼 남아있다.

일년내내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료전시의 기회가 주어지는 인사동 갤러리카페〈젊은인사〉. 갤럭시탭S6,아트레이지. [그림 홍미옥]

일년내내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료전시의 기회가 주어지는 인사동 갤러리카페〈젊은인사〉. 갤럭시탭S6,아트레이지. [그림 홍미옥]



제비가 머물던 종로에는 그림이야기 가득한 갤러리카페가 둥지를!

13인의아이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다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중략)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엿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 이상, ‘오감도’, 조선중앙일보,1934년-

그 난해함이 아직도 독자를 고민하게 만드는 이상의 시 ‘오감도’가 태어난 곳은 시인의 작업실도 연구실도 아닌 제비 다방이었다. 알려졌다시피 이상이 1933년, 기생 금홍과 종로에 차린 다방이다. 우리에게도 소설과 영화로 이미 익숙한 이름이다.

당시 제비 다방을 위시한 낙랑팔러, 멕시코다방 등은 단지 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었다. 문화·예술을 토론하고 공유하며 작품을 발표하는 등 문화예술의 산실 노릇을 톡톡히 해내었다. 당시 유명 작가들의 면면을 봐도 그렇다. 소설가 박태원을 필두로 시인 김기림, 화가 구본웅 등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이 단골이었다고 전해진다. 천재 시인으로 불리는 이상이 제비 다방을 만들었던 이유는 동시대의 예술인이 소통하고 교류하는 공간을 꿈꾸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비록 그 꿈을 펼치기도 전에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지만….

몇 해 전부터 우리 곁에도 이상의 ‘제비’와 같은 문화 카페가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의 해방구인 홍대 근처와 지긋한 은발의 시니어들이 즐겨 찾는 종로가 대표적이다.

카페문화에 순수 미술 꽃 피우는 사람들

이선미 작가의 〈꽃과 나비〉전이 열리고 있는 갤러리카페. [사진 박보경]

이선미 작가의 〈꽃과 나비〉전이 열리고 있는 갤러리카페. [사진 박보경]

종로의 오랜 골목을 걷다 보면 시인의 찻집, 화가의 집터 등이 눈에 들어온다. 솔직히 지금은 뭐든지 번쩍거려야 하고 높고 웅장해야만 눈길을 끄는 시대다. 종로, 그중에서 인사동도 별반 다르지 않다.

여행자들이 넘쳐나던 시절의 풍경은 아니지만 국적 불명의 전통(?)공예품이 싼 가격표를 달고 오늘도 열 일을 하는 중이다. 하지만 살짝 그곳의 뒤편으로 들어가면 몇십 년의 타임슬립을 경험하게 된다.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 것만 같은 낡은 여관, 작은 찻집, 그리고 누군가의 살림집이 좁은 골목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지금 2021년에도 종로 제비 다방이나 파리의 카페 마고 같은 장소가 숨어있다. 하지만 이름만 대면 알만한 저명인사 대신 평범한 ‘우리들’이 이용하는 게 다른 점이랄까?

인사동 골목길 끝에는 세월의 더께가 보이는 찻집이 있다. 갤러리카페 ‘젊은인사’다. 천정의 서까래와 출입문의 살짝 뒤틀린 소나무가 풍기는 향기까지 소박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의 장소였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곳에선 일 년 내내 무료전시가 열리고 있다는 거다. 내가 들렀던 그 날도 마침 작품을 설치 중이었다. ‘나비의 꿈’이라는 전시명답게 작가와 갤러리카페 대표는 꿈을 꾸는 듯 분주했다. 정성껏 여러 차례 덖은 더덕 차의 쌉쌀한 내음도 함께 어우러지고 있었다.

반갑고도 고마운 건 ‘오~~누구!’ 할 만한 유명 화가는 물론이오, 그림을 그리는 누구에게도 그 문은 열려 있다는 점이다. 뒤늦게 그림을 시작한 이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그림과 사랑에 빠진 직장인, 그림밖에 모르는 사람, 그림이라곤 모르지만 그림을 좋아하는 이들 등등. 그러니까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열려있는 한바탕 예술의 마당인 것이다. 자연스레 카페 테이블은  카공족의 노트북 대신 작은 스케치북과 휴대용물감이 차지했다.

예술의 향기란 이런 걸까? 향긋한 물감 냄새와 반짝이는 눈빛, 회벽에 걸린 누군가의 그림! 그리고 우리에게 펼쳐진 문화의 돗자리! 의외로 제비 다방이나 마고 카페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여기 종로에.

화가가 아니어도 좋아 

자연스레 그림모임이 이루어지는 미술카페들이 홍대.인사동 주변에 생겨나고 있다. [사진 박보경]

자연스레 그림모임이 이루어지는 미술카페들이 홍대.인사동 주변에 생겨나고 있다. [사진 박보경]



언젠가부터 이름난 카페는 소위 카공족(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장악한 지 오래다. 도서관을 방불케 하는 풍경이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건 물론이오, 자칫 대화가 소란스러워지면 어김없이 날아드는 힐난의 눈빛도 감수해야 한다. 하물며 물감·스케치북을 늘어놓고 그림을 그리는 건 여간 용감한(?) 일이 아닐 터다. 하지만 요즘 들어 부쩍 인기를 끌고 있는 갤러리를 겸한 카페, 혹은 아예 재료까지 갖춘 그림 카페에서라면 걱정은 할 필요 없다. 인사동, 홍대 주변엔 맘 편히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제법 있다.

비 내리던 어느 날 종로, 우리 중년들도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그림 그리기에 돌입했다. 작은 수첩이든 스케치북이든 아님, 메모지라도 괜찮다. 그날 우리의 손엔 스케치북 대신 태블릿, 붓 대신 터치펜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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