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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진씨는 본래 안동김씨…성되찾아주오”/진씨 종중회장 진동혁교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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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대학교수가 「뿌리찾기」 탄원/고려때 원황제 미움사 변성/“종인 4백명 함께 바꿔달라”
대학교수가 자신의 성이 조상때 잘못 주어진 것이라며 「뿌리되찾기」운동을 벌이고 있다.
연안진씨 종중회장인 단국대 국문학과 진동혁교수(55)는 자신의 조상은 원래 안동김씨이므로 4백여명의 연안진씨를 모두 김씨성으로 바꿔줄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진교수가 「안동김씨 문헌록」 「시중공실록」 등 사료를 고증에 밝힌바에 따르면 본래 진교수의 조상은 고려 충열왕때의 좌시중(좌의정)을 지낸 안동김씨6대조 김학.
김학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원의 황제가 의관정제한 자신을 남만ㆍ서융 등 거의 벌거벗은 오랑캐족과 동렬의 좌석에 앉게하자 『우리는 소중화로서 의관문물이 중국에 버금가는데 어찌 이런 자리에서 앉힐 수 있느냐』고 항의하며 원제에게 상석에 앉혀줄것을 요구했다.
격노한 원황제가 『당장 목을 베라』고 지시했으나 신하들은 목을 벨 경우 고려의 사신들이 오지않을 것을 우려,환국시켜 충렬왕으로 하여금 죽이도록 했다.
그러나 충렬왕은 김학의 기개를 높이 사 원나라에는 처형한 것처럼 소문을 낸뒤 김학의 성을 바꿔 숨어살도록 했다.
「김」자의 맨아랫쪽 「일」획을 위쪽의 「인」획에 더하고 「이」를 덧붙여 「진」씨로 사성,강원도 삼척으로 보낸 것이다.
삼척에서 4대를 산 김학의 후손들은 그뒤 원에 발각될것을 우려,다시 이주령이 내려지는 바람에 황해도 연안으로 옮겨가 연안진씨가 됐다는 것.
조선 순조때인 1817년 충북 음성에 흩어져 살던 일부 후손들은 한양ㆍ종로거리로 몰려가 순조의 행차때 『우리는 억울하게 성이 바뀌었다』며 읍소,복성령을 받아 김씨로 회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교수의 직계선조인 당시 말죽거리(현 강남구 도곡동)부근에 거주하던 1백50가구는 연락이 닿지못해 이 사실을 모르고 계속 진씨 성을 사용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진교수가 뿌리찾기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은 경기도 광주군에서 면장을 지냈던 선친 진명한씨의 영향 때문.
선친 진씨는 해방직후 성을 되찾기 위한 소송을 냈다가 증빙자료가 없어 지고말았다는 것이다.
진교수는 또 지난70년 광산붕괴사고시 20일만에 극적으로 구출된 광부 양창선씨가 살아난 직후 『성을 김씨로 바로잡아달라』고 요구,박대통령의 허락을 받은데 자극을 받게됐다. 그때부터 20여년간 진교수는 각종 역사자료와 문헌 등 증빙서류를 모아 자료집으로 만들어 탄원서와 함께 최근 청와대에 제출햇다.
진교수는 현재 호적상으로 진씨지만 안동김씨 족보에는 복성파김씨로 등재되어 있다. 그래서 자신의 발표논문 등에는 진동혁이란 이름뒤 괄호안에 김정년이란 이름을 반드시 기재한다.
또한 경기도 광주군 광주읍 쌍령리에는 복성령에 따라 김씨가 된 복성파 김씨들의 집 성촌이 있으며 84년에 시조인 좌시중의 가묘를 설치해 놓고 있다.
진교수는 『쓸데 없는 짓을 한다는 말도 듣지만 뿌리를 바로 잡는것이 후손들을 위한 가장 시급한 책무』라며 『법적으로 불가능하다면 헌법재판소까지라도 가서 올바른 성을 회복할 것』이라고 다짐했다.<최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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