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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자립 돕는다지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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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최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현철 정책디렉터

최현철 정책디렉터

지난 7일 오후, 국회 보건복지위 국정감사 증인석에 신모씨가 섰다. 수원에 사는 발달장애인의 엄마라고 소개한 그는 사진을 몇장 들어 보이며 아들 상태를 전했다. 18년째 장애인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들은 가위로 옷이며 이불을 닥치는 대로 잘라 늘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있고, 침대에도 과일을 싸는 노란 보자기를 깔고 잔다고 했다. 손발톱을 물어뜯어 성한 곳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일종의 집착 증세인데, 도저히 감당이 안 돼 장애인 시설에 입소시켰다고 한다. 이런 아들이 시설에서 다시 나가게 되면 행복해진다고 장담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제발 현장에 나와 조사를 해봐 달라.” 그의 마지막 호소는 절규 같았다.

그가 어쩌면 숨기고 싶은 사연을 국감장에서 공개한 이유는 보건복지부가 8월 2일 발표한 ‘탈시설 장애인 지역사회 자립지원 로드맵’ 때문이다. 신씨와 같은 처지의 부모들은 이 로드맵이 의사 표현이 불가능한 발달장애인들을 시설에서 내쫓아 결국 돌봄을 부모에게 전가하는 것이라며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장애인 탈시설 로드맵, 반발 거세
주거선택 보장하나 부작용도 커
대통령 공약보다 현실 잘 살펴야

장애인 단체와 관련 전문가들은 오래전부터 장애인이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자유롭게 살면서 보호받아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특히 시설에서 학대했다는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여론도 들끓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장애인 탈시설’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당선 후 국정과제로 정했다. 집권 마지막 해에 이르러 로드맵이 나왔다.

그런데 어렵사리 만든 로드맵이 나오자마자 혹독한 비판에 휘말리고 있다. 가족 단체는 연일 시위 중이다. 천주교 주교회의 산하 사회복지위도 공식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국가인권위까지 최근 “미흡한 점이 있으니 조속히 후속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왜 선의로 시작한 정책이 정작 당사자들로부터 외면을 넘어 비난을 받는 것일까.

지난 8월 10일 전국 장애인거주시설 부모회 회원들이 정부세종청사 보건복지부 앞에서 발달장애인 탈시설 정책 철회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뉴스1]

지난 8월 10일 전국 장애인거주시설 부모회 회원들이 정부세종청사 보건복지부 앞에서 발달장애인 탈시설 정책 철회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뉴스1]

로드맵의 첫 번째 항목이자 핵심 목표는 장애인에게 주거 선택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시설에 있는 장애인이 원하면 공공임대주택을 주고, 그곳에서 독립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사회적 지원을 확대한다는 내용이다. 2041년까지 해마다 현재 시설에서 740명씩 내보낸다는 목표를 세웠다. 새로 시설을 만드는 건 금하고, 현재 있는 시설은 주거서비스 제공기관으로 바꿔 나간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의욕과 명분, 숫자가 가득한 로드맵을 보자니 첫 번째 대목부터 의문표가 찍힌다. 주거 선택권을 준다는데, 정말 선택이 가능한 것일까.

정책을 설명한 보고서 밖의 사정은 이랬다. 지난해 복지부가 전수조사한 결과를 보면 전국 612개 시설(단기, 그룹홈 제외)에서 2만4000여 명의 장애인이 거주하고 있다. 98%가 중증이고, 80%는 발달장애, 즉 지적장애와 자폐 증상자다. 그런데 전체 발달장애인은 24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요약하면 현재 전국의 장애인 시설은 전체 발달 장애인의 10%를 수용해도 포화상태란 의미다.

발달장애의 특성은 몸은 어른인데 행동과 사고는 어린아이 수준이라는 것이다. 중앙일보와 인터뷰한 한 장애인 부모는 발달장애를 ‘힘센 치매’ 상태라고 표현했다. 어릴 땐 부모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돌보지만 성인이 되면 점차 힘에 부치게 된다. 결국 시설을 찾게 되는데, 늘 포화상태다. 기다리다 상태가 안 좋아지면 몇 달씩 정신병원에 들어갔다 나오는 인고의 세월을 견뎌야 한다. 그러다 지쳐 함께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례도 간간히 들려온다.

아직 시범사업 기간인데도 이미 곳곳에서 로드맵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시설마다 더는 신규 환자를 받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시설에 자리가 나기만을 애타게 기다려온 가족들에겐 청천벽력 같은 얘기다.

시설을 나온 장애인에게 제공하는 서비스도 공공임대주택과 주·야간 돌봄 인력 제공 정도가 전부다. 몇 년 전 특수학교 건립에 반대하는 주민들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호소하던 부모들의 모습이 아직 생생하다. 어쩌면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자립하려면 공공임대주택보다 이런 분위기를 개선하는 것이 더 시급할 것이다. 하지만 로드맵 보고서 어디에도 이에 대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큰 시설을 없애는 대신, 작은 주거공간으로 장애인을 옮겨 방치하는 상황이 올 수밖에 없다.

장애인에게 주거 선택권을 주고, 획일적인 돌봄 대신 자립 기반 마련으로 전환하는 일은 정말 필요하다. 하지만 보고서 밖의 풍경을 고려하지 않은 이번 로드맵은 대통령 공약 이행을 위한 숫자 놀음에 불과하다. “정말 장애인의 삶을 생각한다면, 시설 밖의 장애인들에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모델을 제시하는 게 먼저 아니냐”는 한 부모의 날 선 외침이 마음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