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LA공항에서의 제자리걸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사회2팀장

김승현 사회2팀장

돌이켜보면 고통스러운 제자리걸음이다. 2007년 11월 15일 미국 LA 국제공항에서 한국인 기자 10여 명은 오후 12시 10분 발 아시아나 항공기의 탑승 게이트 앞을 서성였다. 1주일 전쯤 미국에 온 이들은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의 동업자로 의심받는 주가조작 사기범 김경준 BBK 사장을 인터뷰하려고 했다. LA 구치소에 수감된 김씨가 한국으로 송환되는 비행기에 동승하는 게 1차 목표였다. 한국 법무부와 검찰은 언론의 접근을 차단하려고 ‘007 작전’을 폈다. 어설픈 보도가 자칫 수사와 대선 정국에 악영향을 준다는 대의명분이었다.

김씨의 귀국일과 비행기편 등에 대한 역정보가 쏟아졌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탑승을 확신하기 어려웠다. 급기야 기자들은 송환이 의심되는 비행기 시간이 되면 항공권을 사 들고 탑승 게이트 앞에 대기했다. 김씨가 안 보이면 티켓을 환불하고 이후 다시 대기하는 ‘탑승 뻗치기’를 반복했다.

김경준과 남욱의 평행이론
14년 전 진실 찾기는 실패
검찰 흑역사 또 쓸까 두려워

2007년 11월 미국 LA에서 한국으로 송환된 김경준씨가 검찰로 호송되고 있다. [중앙포토]

2007년 11월 미국 LA에서 한국으로 송환된 김경준씨가 검찰로 호송되고 있다. [중앙포토]

드디어 탑승이 유력한 아시아나 항공편의 출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갑자기 탑승 브릿지가 아닌 버스 이동식 탑승으로 변경됐다. 법무부의 보안 작전이 의심됐다. 한번 비행기에 오르면 내릴 수 없는 기자들은 난감한 처지가 됐다.

그때 기자들을 안쓰럽게 지켜보던 교민들이 나섰다. “김경준 얼굴을 아니까 먼저 가서 찾아보고 전화를 해줄게요.”

탑승객 10여 명이 기자들에게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주고 비행기에 먼저 올랐다. 기자들과 통화를 하며 비행기 곳곳을 뒤졌다. “김씨가 없다”는 여러 교민의 ‘보고’가 이어졌다. 기자들이 망설이는 사이, 탑승구는 닫혔고 비행기는 이륙했다.

바로 그 비행기에 김씨가 타고 있었다는 정보가 10분 뒤 한국에서 전해졌다. 현장에 있던 필자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경험을 처음으로 했다. 승무원 휴식 공간인 ‘벙커’라는 곳에 김씨가 숨어있었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게 됐다. 유력 대선 후보 관련 의혹의 실체를 좇아 바다까지 건넜는데,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다니…. 검찰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취재 실패의 경험은 기자 경력의 흑역사로 남았다. 귀국 후 선배가 붙여준 ‘LA곰바우’라는 별명과 함께.

지난 18일 LA에서 귀국하는 남욱 변호사를 보며 14년 전 LA 공항이 떠올랐다. 이번에도 기자들은 양국의 국제공항에 진을 쳤다. 검찰에 체포되기 전까지 남 변호사의 얼굴과 목소리는 공개됐다. 그러나, 여전히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기는 어려워 보인다. “검찰에서 다 말하겠다”는 남 변호사의 말대로 언론은 또다시 검찰의 손바닥 위에 서게 되는 것일까.

14년 전 조금 더 영리하고 효율적인 취재를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자책을 자주 했다. 동시에 어떤 성과를 냈더라도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미미한 몸짓에 불과했을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이후 언론의 바통을 넘겨받은 검찰에서 쓰인 ‘찐 흑역사’ 때문이다.

2007년 대선을 전후해 진행된 이 전 대통령과 BBK 사건에 대한 수사에서 대부분의 의혹은 무혐의로 결론이 났다. 검찰과 특검은 “이 전 대통령은 주가 조작과 관련이 없고 BBK나 다스의 실소유주가 아니다”는 취지의 발표를 했다. 김경준씨는 횡령과 허위사실 공표 등의 혐의로 2009년 5월 대법원에서 징역 8년과 벌금 100억원이 확정됐다.

그러나, 10년 뒤 역사는 뒤집혔다. 이 전 대통령은 2018년 재수사를 받아 뇌물·횡령 등 혐의로 기소됐다. 대법원은 지난해 10월 징역 17년과 벌금 130억 원, 추징금 57억 8000여만 원을 선고했다. ‘다스는 누구 겁니까’라는 10년 넘은 질문에도 실소유주는 이 전 대통령이라는 답을 내놨다. 그 다스의 돈이 BBK에 투자됐으며 이 전 대통령이 이를 돌려받으려 애쓴 사실이 드러났다.

이 전 대통령은 “법치가 무너졌다”며 현재의 검찰과 법원을 비판했고, 김경준씨는 과거의 검찰을 비난했다. 2017년 만기 출소한 그는 지난해 한 시민단체를 통해 발표한 입장문에서 “‘그때는 틀리고 현재는 맞다’고 한 검찰의 진정어린 반성과 정치 검찰들의 왜곡된 행태에 대한 진실규명이 없다”고 했다.

지금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을 수사하는 검찰에 불신감이 큰 것은 이런 경험칙에 근거한다. 미래권력 주변의 의혹에 대한 진실 찾기에서 정의와 법치가 우선순위였던 적이 있는가. 성남시 고문 변호사 경력을 함구한 검찰 수장이나 성남시 압수수색에 뒤늦게 나선 검찰의 행태는 벌써부터 국민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고 있다. 가까운 미래에 또 하나의 흑역사가 만들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