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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테크네’, 삶을 풍요롭고 가치 있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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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기술을 통해 앞서기’(Vorsprung durch Technik). 15초 안팎의 TV 광고에 스치듯 지나가는 이 문구를 볼 때마다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한번쯤 그 차의 핸들을 잡아보고 싶다는 욕구가 뱃속에서 스멀거린다. 근거 없는 오만함으로 읽히는 ‘자동차 그 자체’(Das Auto)라는 문구보다 훨씬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굳이 문명 변천사를 논하지 않더라도 더 나은 삶을 향한 사회적·문화적·물리적 환경의 변화는 기술적 진보와 그 궤를 같이한다. 마을 이장님 댁에 기계식 전화기라도 놓여 있으면 그나마 다행, 우체국까지 수십 리 산길을 달려가 전보를 치던 것이 그리 오래전 풍경이 아니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Ars longa, Vita brevis)라는 히포크라테스의 탄식(?)을 ‘예술의 영원성’으로 읽는 것은 예술가들의 아전인수(我田引水) 격 해석에 가깝다. 그가 살던 시기는 아직 기술과 예술이 분화되기 이전이었으니까. 예술(art)과 기술(technique)의 공통 어원인 테크네(techne)는 필요한 것을 능숙하게 만들어 내는 능력, 즉 유용성과 효율성을 겸비한 실천적·생산적 활동 전반을 의미한다.

실천적 행동의 기반이 되는 둘
효용성에 미적 가치 더한 ‘예술’
보편·합리적 진리로서의 ‘과학’

이를 삶에 기여하는 효용에 따라 ‘필요에 따른 기술’과 ‘쾌락을 위한 기술’로 구분한 이가 아리스토텔레스, 그로부터 한참 후인 18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미적 가치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기술을 ‘예술’이라 칭하기에 이른다. 예술이 영감이나 상상에 의한 비합리적인 정신 영역에 속한다는 생각을 전적으로 반박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이렇듯 예술은 본질적으로 기술적 속성을 지닌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강조하는 ‘실천적 행동’이 구슬을 능숙하게 꿰어 ‘보배’를 만드는 ‘기술적 능력’을 전제로 하듯이…. 서너 명의 수비수를 현란한 발재간으로 젖힌 후 멋진 궤적을 그리며 골문 구석에 꽂아 넣는 슈팅을 보며 “와! 예술인데?”라며 감탄하는 것처럼 ‘예술’이라는 단어는 실용성과 효율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름다운 경지에 이른 기술적 역량에 대한 최대의 찬사다.

이러한 예술의 기술적 측면과는 달리 예술과 과학(학문)은 대체로 무관한 것으로 여겨진다. 융·복합이라는 커다란 흐름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서로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기껏해야 피상적 협력이나 접목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예술에 과학적 측면이 내재하고 과학에 예술적 측면이 필요함은 위대한 예술가나 과학자들의 업적과 그들이 남긴 명언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모든 학문은 어떤 지점에서 예술과 맞닿아 있다. 모든 예술 역시 과학적 측면이 있다. 최악의 과학자는 예술가가 아닌 과학자고 최악의 예술가는 과학자가 아닌 예술가다.” 프랑스의 물리학자이자 내과 의사였던 아르망 트루소(1801~1867)의 말이다.

미국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1888~1959)도 비슷한 말을 남겼다. “두 가지 진실이 있다. 하나는 길을 밝히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다. 길을 밝히는 것이 과학이라면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예술이다. 이 둘 중 어느 것도 독립적이거나 더 중요하지 않다. 예술이 결여된 과학은 배관공 손에 쥐어진 쓸모없는 수술 가위이고, 과학이 결여된 예술은 민속적인 것과 감성팔이로 조잡한 난장판일 뿐이다. 예술적 진실은 과학이 비인간적으로 되는 것을 막고, 과학적 진실은 예술이 어처구니없어지는 것을 막는다.” 이를 한마디로 정리한 이도 있다. 러시아 태생 문학가 블라디미르 나바코프(1899~1977)는 이렇게 말했다. “상상력이 결여된 과학은 없다. 그리고 사실적이지 않은 예술도 없다.”

‘이론이나 사물을 유용하도록 잘 다루는 능력’(기술), ‘보편적 진리나 법칙을 밝히는 체계적 지식’(과학), ‘미적 체험의 대상’(예술), 이 셋 중 어느 하나로부터 유리된 삶은 상상하기 어렵다. 기술의 실천적 생산성, 과학의 체계적 합리성, 예술의 심미적 독창성은 각기 지향점을 달리하는 상반된 영역으로 여겨지지만 테크네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자라고 피어나 우리의 삶을 지탱한다. 실용적 기술에 미적 가치를 더할 때, 합리적 연구에 상상력과 온기를 더할 때, 심미적 표현이 합리적 질서와 탁월한 기술력으로 구현되었을 때, 기술과 과학과 예술은 테크네로 다시 하나가 된다.

글을 맺기 전에 하나 더 덧붙이자. 아인슈타인(1879~1955)의 말이다. “종교가 결여된 과학은 한쪽 다리를 잃은 것과 다름없다. 과학이 결여된 종교 역시 앞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삶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분야의 뿌리는 이것 하나뿐이다. 삶을 풍요롭게, 더 나아가 가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