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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일본 사상가의 ‘두 얼굴’ 동시에 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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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허우성 경희대 명예교수

허우성 경희대 명예교수

사람의 행위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주장한 철학자가 있었다. 하나는 자유·독립·창조·생명의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부자유·의존·반복·죽음의 행위이다. 전자가 능동과 개성의 ‘함’이라면, 후자는 수동과 몰개성의 ‘당함’이다.

그는 27세쯤 쓴 편지에서, 선(善)과 ‘진정한 자기’를 찾아야 할 장소로 깊고 깊은 ‘마음속’을 말하고 있다. 욕·망념·비천함의 근본을 자르고 내심으로 깊이 들어가 진정한 자기를 얻는 데서 선, 아니 진선미가 구현되고 생명도 얻지만, 다른 것에 억눌리면 죽음이다. 진정한 자기와 하나 되는 시간이 1분이어도 생명은 영원하다고 썼다.

생명철학 정립한 철학자 니시다
제국주의 일본의 국체 옹호 논란
비판하되 철학적 기여 인정해야
일본 대하는 우리 자신감도 커져

이상은 근대일본의 대표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1870~1945)가 전개한 생명철학의 핵심이다. 배경에 일본의 선불교도 있었다. 마음에 의혹이 생기면 붓다나 예수와 같은 심령적 위인을 찾아야 한다고도 했다. (『전집』 11, 2005)

니시다는 『선(善)의 연구』에서 한순간의 능동적 동작을 직접경험이나 순수경험이라 불렀다. 색을 보고 음을 듣는 순간, 숙련된 음악가가 연주하는 순간이 바로 순수경험이다. 그리고 괴테가 꿈속에서 직각적으로 시를 지은 일, 종교인이 피아합일(彼我合一)을 직각한 것, 모차르트가 작곡할 때 악보 전체를 직시한 것, 이것들은 직각의 순간 속에 이미 전체나 일반이 깃들어 있음을 보여주는 순수경험의 사례다.

화가에게 흥이 일어나 화필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에도,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에도 전 인격이 들어있다면 그것이 자유이고, 마음은 신격이 되고 몸은 신상(神像)과 같이 된다고도 했다. (1917, 『전집』 2) 순간의 기준이 완벽이니 길이는 다를 수 있다. 붓다와 예수는 평생, 순간 즉 영원을 사신 분이다.

순간 속에 완전을 담는 행위는 국경을 넘어 보편적이다. 조성진과 같이 숙련된 연주자가 드뷔시의 ‘달빛’을 연주할 때, 앞의 음은 뒤에 오는 음을 위한 연습이 아니다. 완벽한 순간들의 불연속의 연속이 전곡이다.

‘달빛’ 감상은 편안하고 아름답다. 신문에 글쓰기는 퇴고와 비판을 수반하니 의식이 흩어져 순수경험이 되기 어렵다. 글 안에 전 인격을 담으려 노력할 뿐이다. 욕정의 순간은 잘 부서지고 흔히 폭력을 낳는다.

니시다는 일체의 한정이나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운 순수경험의 현재를 절대현재의 자기한정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가 순간 동작이나 행위에 주목하며, 서양철학의 대표 논리 ‘일의 다’(一の多)를 비판하고, ‘일즉다’(一卽多, ‘多’ 하나하나가 ‘一 완전’)의 논리를 폈다는 점에서, 그는 세계 일류철학자로 불릴 만하다.

그런데 니시다는 1930년대 일본이 전쟁기에 돌입하자 천황과 국체(國体)를 철학적으로 옹호하며, “절대현재의 자기한정으로서 아국의 국체란 것은, 이런 입장에서의 역사적 행위의 규범이다. (···) 대승의 참된 정신은, 동양에서 금일, 우리 일본에서만 유지되고 있다”고 했다. (1944, 『전집』 10)

필자는 그의 역사철학을 거듭 비판해왔다. 치안유지법의 압박도 있었겠지만, 국체를 옹호하는 국가주의는 일본국민의 자유와 능동성을 억압했고, 타국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한겨레신문은 최근 ‘일본불교 두 거장, 제국주의 미화했다’라는 기사를 게재하고(2021.8.5), 『불교평론』(2021 여름)에 실린 필자의 글을 이렇게 인용했다. “니시다가 영국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양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하여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반대하고, 동아공영권의 기치를 높이 들고 천황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각국이 단결해야 한다고 썼을 때, 그는 유사제국주의자가 되었다.”

맞다. 하지만 필자는 같은 글에서 이런 말도 했다. “니시다 철학은 우리에게 적어도 두 개의 얼굴로 다가온다. 한 얼굴에서는 생명의 약동을 보고, 또 다른 얼굴에서는 제국주의 일본을 본다. 진정한 자기라는 생명의 샘에서 솟아나는 절대영원의 행위는 구원의 몸짓이다.” 결론에서 “순수와 절대의 한순간을 참으로 경험하여 민족이나 국가를 초월할 수 있는 자만이 니시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다”라고도 했다.

위에서 언급한 기사는 생명의 한순간에 대해 침묵했다. 왜 그랬을까? 한국이 니시다의 생명철학은 무시해도 생존·생육에 별 지장이 없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는 다르다. 그런 가치를 포함해서, 한·일이 외교와 경제에서도 공동의 가치를 찾아 함께 실행한다면 국익에 더 유리할 수 있다.

일본사상을 다룰 때 공과(功過)를 동시에 말할 수 있을 만큼 대한민국은 이미 독립했고 충분히 당당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