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삶의 향기

“그들은 저급해도 우리는 품위 있게”

중앙일보

입력 2021.10.19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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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유자효 시인

유자효 시인

1997년 가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방송토론회가 열렸습니다. 당시의 빅3 후보는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 그리고 한나라당에서 나와 국민신당을 창당해 출마한 이인제 후보였습니다. KBS와 MBC·SBS가 공동 주최한 토론회에 저도 참여했지요.

김대중 후보의 토론회 땝니다. 정치·경제·사회 등 토론은 돌고 돌아 어언 편성된 2시간이 흘러 마지막 질문 순서가 되었습니다. 마지막 질문은 차례에 따라 제게 돌아왔습니다. 저는 “좋아하는 시가 있으면 읊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김 후보는 “혹시 제가 나이가 많다고 하면 소개하려고 준비해온 것”이라며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읽었습니다. 그때 김 후보는 일흔네 살로 세 후보 가운데 가장 연장이었습니다.

쌍욕·거친 표현 오가는 대선
트럼프와 차별화한 미셸처럼
품위 있는 대통령 갖고싶어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마음가짐을 뜻하나니/장밋빛 볼, 붉은 입술, 부드러운 무릎이 아니라/풍부한 상상력과 왕성한 감수성과 의지력/그리고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을 뜻하나니······”

사무엘 울만이 일흔아홉 살에 쓴 명시 ‘청춘’이었습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책상 위에 두고 애송했다는 이 시는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에게 생소했습니다. 김 후보의 낭독이 끝나자 치열했던 그날 토론회는 분위기가 좋아졌고, 울만의 ‘청춘’이 우리나라에서 널리 애송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때로부터 24년이 지나 내년에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집니다.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은 대통령 후보를 확정했고, 국민의힘은 네 명으로 예비후보를 좁혔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번 대선은 높아진 국민의 눈높이에 따라 그 어느 때보다 공명정대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지난 대선은 드루킹 일당의 댓글 조작 사건이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음으로써 심각한 여론 왜곡이 있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지난해 국회의원 총선거가 부정하게 치러졌다는 주장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선거무효 소송이 120건이나 제기됐고, 1년 반이 지나 인천 연수을과 경남 양산을, 영등포을이 재검표됐습니다. 그 결과 비규격 도장으로 기표, 날인된 투표지들과 미리 제작 투함된듯한 투표지들이 발견되었고, 유튜브의 공병호 TV 등은 사전투표에 대한 컴퓨터 조작 등이 자행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반박하는 측은 그런 규모의 부정선거가 이루어지려면 수십만 명이 공모해야 하는데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 공방을 보며 61년 전 3·15 부정선거가 떠올랐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저는 아버지를 따라가 동네 어른들의 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동네에서 존경받는 최연장자께서 “우리는 다 이 박사를 지지하니까···”라며 3인조·5인조 투표를 제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4·19 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번의 경우도 무조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하지 말고 대선 이전에 대법원이 결론을 내려야 할 사안이라고 봅니다.

역대 대선은 의혹 시비로 얼룩져 왔습니다. 많은 대통령들의 퇴임 이후가 불행했던 것도 그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토지수용권이라는 제도로 만든 큰돈을 극소수 부패 세력에 몰아준 경기도 성남시 대장동 특혜 비리 의혹이 성남시 고문변호사를 지낸 김오수 검찰팀의 늑장 부실 수사로 불신을 받고 있습니다. ‘그분’ 즉 ‘몸통’을 밝히는 문제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

미·중 대결로 한반도 주변 정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엄중합니다. 아프간 사태를 보며 월남 멸망의 기시감을 느낍니다. 적화 일보 전에 미국을 비롯한 우방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한 우리는 안보가 생명임을 압니다. 핵무기를 든 북한을 앞에 두고 “대통령이 되면 사드 배치를 철회하겠다”는 어느 후보의 발언에서는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낍니다. 미국·일본·호주·인도(쿼드), 미국·영국·호주(오커스)로 연결되는 동맹체제에 외톨이로 남은 미래의 끔찍한 그림이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국민의 생존권보다 우선하는 가치란 없습니다. 또한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이라는데 옮길 수도 없는 쌍욕이나 “마귀” 등 거친 표현도 섬뜩합니다.

2016년 9월 19일 미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부인 미셸이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통령 후보를 겨냥해 “그들은 저급하게 가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가자(When they go low, we go high)”라고 한 말이 새삼 떠오르는 요즈음입니다. 이제 우리도 세계 10대 경제 강국, 백범 김구 선생이 그토록 원했던 문화 선진국에 어울리는 좋은 대통령을 갖고 싶습니다. 배우고, 따르고 싶은, 품위 있는 대통령을 갖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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