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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日시민들 박수, 훈장도…영웅 대접 받은 왕비 시해범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53)

프랑스 주간지 『르 주르날 일뤼스트레』 표지기사 '조선 왕비 암살(L'ASSASSINAT DE LA REINE DE COREE)'. [사진 Wikimedia Commons]

프랑스 주간지 『르 주르날 일뤼스트레』 표지기사 '조선 왕비 암살(L'ASSASSINAT DE LA REINE DE COREE)'. [사진 Wikimedia Commons]

일본의 의도

1895년 10월 8일 새벽 2시경 미우라는 마포 공덕리 아소정으로 일본군 수비대 제1중대를 보내 대원군을 가마에 태워 호위하고 경복궁으로 향하게 했다. 아소정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대원군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명성왕후 시해사건에 들러리를 서게 된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 대원군을 데려다 놓은 것은 일제가 사건의 모든 책임을 명성황후의 정적인 대원군에게 덮어씌우려는 목적에서였다.

웨베르보고서에는 사건이 벌어진 뒤 각국의 공사관들이 일본 공사관에 찾아가 사건의 진위와 일제의 관련 여부를 추궁하자 미우라는 “불합리한 풍설을 퍼뜨리는 악의에 찬 조선인의 말보다 일본인의 말이 더 신임할만하다” 며 일본과 무관한 일이라고 발뺌을 했다. 그러자 웨베르가 목격자는 조선인이 아니라 서양인이라고 말하자 일본 공사관은 당황해 하고 다시 알아 봐야 한다며 회의를 일방적으로 끝내 버렸다.

세계 각국 언론의 보도와 반응, 일본의 변명

알렌(미국공사관 서기)이 총소리에 놀라 깬 것은 새벽 5시. 곧 이어 이범진으로부터 고종의 화급한 전갈을 받고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함께 입궐했다. 그들은 궁궐에 도착해 산만한 복장의 칼 찬 일인들이 광화문에서 나오는 것을 목격하였다(7시). 입궐 후 한 시간 반 가량을 기다리다가 방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 고종과 미우라가 있었다. 당시 미우라는 고종에게 “훈련대와 순검의 충돌을 막아달라는 고종의 요청으로 일본군을 보내 현장에 도착해 보니 사태는 일단락된 뒤였다”고 했다. 그러나 알렌 등이 직간접으로 접한 현장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알렌 등 외국공사들은 다이, 사바틴, 현홍택, 의녀, 궁녀 등 현장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직접 들은 상황 설명으로 일본군, 경찰, 일본 공사관원 등 일본인들이 황후 시해를 자행하였고 미우라가 이들의 사주자임을 간파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미국공사 알렌, 힐리어 영국영사, 웨베르 등 주한 외교관들의 보고와 뉴욕헤럴드의 특파원 코커릴 등에 의해 이 사건이 각국에 알려졌다.

코커릴은 을미사변 전말 기사를 미국에 간급 타전했다. 특종 기사가 나자 세계 각국은 경악했다. 유럽과 미국 등은 일본을 비난했고, 일본 내에서도 비판이 일었다. 이 사건이 국제적으로 비화되자 일본은 『고꾸민신문(國民新聞)』 10월17일자에 낭인들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이라고 축소 조작해 사건을 보도했다.

“황후가 훈련대를 믿지 않았다. 비밀리에 왕궁 시위대가 훈련대를 무장 해제하고 해산시키려고 시도했다. 이런 계획이 노출됐고 훈련대와 대원군이 밀접한 동맹을 맺고 있다 하더라도 협상이 갑자기 이뤄졌는지 혹은 오래 전에 이뤄졌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궁녀들과 황후의 거처에 다가오는 훈련대 사이에서 소란스러운 싸움이 벌어졌다. 궁궐에 맨 처음 나타난 외교관은 일본 전권 위원인 미우라 고로 자작, 러시아 공사 M. 웨베르, 그리고 합중국 공사관의 알렌 박사였다. 그들은 곧 왕을 알현했는데 그때 대원군과 함께 있던 국왕은 생기가 없었다. 국왕은 그 사태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소극적인 한국 사람들이 이 비극에 참여했으며 그것은 귀족들의 반목이며 인민과는 무관하다고 대답했다. 많은 고급관리가 도망쳐 살 길을 찾아 나섰고 내각은 모조리 교체되었다.”

이에 대하여 1895년 10월 31일자 노스차이나 헤럴드 신문은 “이 사건을 깡패들이 흔히 저지른 하찮은 소란으로 의미를 축소하려는 것은 일본인들의 잔꾀”라고 보도해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은폐하고 축소하려는 일본 측의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사태가 불리해진 일본 정부는 외교와 언론 등을 통해 일본 군민은 이 사건과 하등 관련이 없으며 대원군과 조선왕비의 ‘중세적 정권 다툼’ 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호도했다.

시해 가담자 처벌 안 받아

명성황후의 침전으로 민가의 안채에 해당하는 곤녕합. 곤녕합의 남쪽 누각인 옥호루는 명성황후가 시해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명성황후의 침전으로 민가의 안채에 해당하는 곤녕합. 곤녕합의 남쪽 누각인 옥호루는 명성황후가 시해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사건이 알려진 직후 범죄자 처벌을 요구하는 세계적 여론이 일자 미우라를 포함한 관련자 56명(군인 8명, 민간인 48명)이 도쿄로 소환되었고 도착하자마자 히로시마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들을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하여 잠시 국제여론의 비난을 피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심리를 맡은 히로시마 재판부는 피의자들이 광화문을 통해 왕성 안으로 들어가 바로 건청궁까지 이른 등의 사실은 인정되나 이들 중에 범죄를 실행한 자가 있음을 인정할 증거는 확실하지 않다며 형식적인 절차를 거친 뒤 시해범 전원을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석방했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석방된 이들을 구국적 영웅으로 대접하는 분위기를 연출해, 시해범들이 기차를 타고 도쿄로 가는 모든 연변에는 시민들이 도열하여 대대적으로 환호하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메이지 일왕은 이들이 도쿄에 도착했을 때 사절단으로 시종 대신을 보내 수고했다고 치하하고 훈장을 수여했다.

이들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행동대원들은 모두 당시 일본의 지식인들로 일제의 대륙침략을 위해 결성된 극우분자였다. 충격적인 점은 을미사변에 가담한 낭인이나 폭도로 알려진 명성황후의 시해범들 중 상당수가 일본 지식인 출신 엘리트들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을미사변이 무지한 폭력배에 의해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일본의 조선 침략이라는 커다란 밑그림 위에서 치밀하게 계획됐고, 극우 지식인에 의해 실행된 작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을미사변으로 재판에 회부됐던 일본인은 모두 56명이었고, 이중에서 ‘민간 낭인’으로 분류된 자는 32명이었다. 시해사건 가담자 대부분은 이후 일본에서 정치요직에 앉거나 사회적인 부와 명예를 얻게 되었다.

명성황후시해 가담자들

을미사변으로 재판에 회부됐던 일본인은 모두 56명. 시해사건 가담자 대부분은 이후 일본에서 정치 요직에 앉거나 사회적인 부와 명예를 얻었다. [사진 pixabay]

을미사변으로 재판에 회부됐던 일본인은 모두 56명. 시해사건 가담자 대부분은 이후 일본에서 정치 요직에 앉거나 사회적인 부와 명예를 얻었다. [사진 pixabay]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당시 일본의 내상과 외상을 역임한 정치 실세로 이토우 히로부미와 함께 일본의 정계를 움직인 자이며 명성황후 암살을 모의하고 미우라를 추천한 인물이다. 미우라와 이노우에는 동향인으로 역사가들은 이노우에가 미우라의 영웅심과 과격한 성격을 이용해 사건의 종범으로 삼은 것으로 해석한다.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이노우에 가오루의 후임으로 특명전권공사로 조선에 왔다.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사건에 대한 국제적 비난이 일어나자 히로시마 지방재판소의 예심에 회부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곧 풀려났다. 1910년 추밀원 고문관이 되었으며 정계의 원로로 활약하는 등 시해 사건 성공 이후 일본 정치계의 거두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다치 겐조(安達謙藏)는 한성신보의 사장이다. 당시 서울에서 일본어로 발행되던 한성신보는 기자를 가장한 일본인들이 조선 정세에 대한 염탐과 정보 수집을 하던 기관으로 일본 외무성에서 모든 운영비를 지급하는 공사관 기관지였다. 시해범 중 상당수가 당시 이 신문사의 기자이거나 신문사에서 숙박하고 있었고 겐조는 낭인들을 동원하고 그들에게 행동 지침을 하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행동대는 대부분 겐조와 동향인 구마모토 출신들이었다. 을미사변 이후 1902년에 중의원 의원이 된 뒤 줄곧 당선돼 14선 의원이 됐다. 1925년 가토 내각에서 체신상이 됐고 뒤에 내상도 역임했다.

호리구치 구마이치(掘口九萬二)는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1894년 일본에서 첫 번째로 시행된 외교관 및 영사관 시험에 합격했다. 을미사변 때 일본공사관 영사관보로 있었으며 시해사건 후 1896년 복직해 브라질 전권공사를 역임하는 등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시바 시로(柴四朗)는 하버드 대학과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엘리트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작전 참모 역할을 한 자이다. 그는 일본에서 정치 소설가로 더 큰 명성을 얻기도 하였으며 1892년 중의원 선거에 당선된 뒤에는 김옥균의 후원자 노릇도 했다. 1914년에는 내각 외무성 참정관을 지냈다.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는 육군 포병소좌 출신으로 1876년 강화도 조약 당시 일본 전권공사의 수행원이었고, 이후 조선으로 건너와 궁내부와 군부의 고문으로 여러 조선인 관리들과 가까이 지냈다. 을미사변 당시 고종의 면전에 칼을 빼들고 침입한 자로 고종이 그 이름을 지목했다.

(그 밖의 가담자: 스기무라 후카시(공사관 서기), 구스노세 사치히코(포병중좌), 히라야마 이와히코(한성신보 기자), 오사카 세이키치(大崎正吉), 토우카츠아키, 하기와라(외무성경찰), 기구치(신문기자), 구니토모 시게아키(한성신보 주필), 사세 구마테쓰(조선경무청 의무관), 이에이리 가키쓰(家入嘉吉), 다케다 한시(문필가), 시부다니(통역관), 야마타(신문기자), 니니와(의약품 판매상), 사사키(의사), 무라이(육군대위), 사토(농민), 마쓰무라(교사), 고바야카와 등 총 56명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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