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혜 외교안보팀장의 픽 : 북한의 조업권 돈벌이
코로나19 방역을 이유로 서해 상에서 우리 국민을 사살한 북한이 동해 상에서는 불법 조업 중인 중국 어선들이 방역 문제로 피해를 보지 않도록 상세한 지침을 안내하고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해마다 두 차례씩 발간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위원회 전문가 패널 보고서는 북한의 다양한 제재 회피 수법을 담고 있다. 지난 5일 공개된 연례 중간보고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단골 메뉴 중 하나인 북한의 조업권 판매 부문에서 눈에 띄는 문서들이 있었다.
北 ‘제재 위반’ 조업권 판매 꾸준
2017년 12월 이후 북한이 제3국에 조업권을 판매하는 건 불법이다.(안보리 결의 2397호) 하지만 보고서에서 전문가 패널은 “회원국이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북한은 자국 영해에서 조업할 수 있는 권리를 제3국 단체에 꾸준히 판매해왔다”며 증거들을 제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 회원국의 해양경비대는 지난해 11월 기상 악화로 인해 북한 해역에서 남하하는 어선 몇 척을 검색했는데, 북한 당국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 다양한 문건이 발견됐다.
우선 북한 해양경비대와 비상방역대가 발급한 ‘처벌작업을 하는 중국 선박들의 행동질서’라는 한글로 된 문건이 있었다. 북한 해역에서 조업하는 제3국 선박이 지켜야 할 지침이었다.
中 어선용 ‘행동질서’…北 당국 발급
해당 문건은 “전세계와 인류의 가장 큰 위협으로 되고 있는 대유행 전염병인 〈신종코로나비루스〉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전파시킬 수 있는 위험을 조성시킨 것과 관련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취한 조치에 따라 해양경비대와 비상방역대의 철저한 방역통제 하에 처벌작업을 하는 중국 선박들은 다음과 같은 행동질서를 철저히 준수하여야 한다”는 문단으로 시작했다.
곧이어 북한 해양경비대와 비상방역대의 지침에 따라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방역 및 소독 검사를 받아야 하고, 선박식별확인서를 발급받아야 한다는 지침 등이 서술됐다.
또 다른 문건은 ‘처벌작업구역’이라는 제목이었는데, 동해 상 좌표 다섯 개의 위도와 경도가 표시돼 있었다. 제목인 ‘처벌작업구역’은 한글과 한자로 병기했는데, 정자체인 ‘處罰作業區域’이 아니라 중국어 간체자인 ‘处罚作业区域’로 쓰여 있었다.
동해 상 좌표 표시한 지도도
이와 별도로 해당 좌표를 여러 선으로 이어 표시해놓은 그림지도도 있었다. 왼쪽에 강원도와 함경도가 일부 보이고, 점과 선은 동해 상에 표시됐다. 보고서는 “지도에는 진입 및 진출 지점으로 가는 항로, 몇 개의 검색 지점, 따라야 할 지침 등이 포함돼 있다”고 설명했다.
보고서는 “전문가 패널은 한국어로 된 문건을 검토해봤지만, 왜 이를 ‘처벌작업구역’으로 부르는지 결론 내리기는 어려웠다”며 “하지만 조업 작업은 해당 구역에 엄격히 제한되는 것으로 보이며, 북한 당국의 허가를 받고 코로나19 방역 절차를 거친 선박들만 해당 수역에 들어갈 수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보고서가 서술한 대로 북한 당국의 허가를 받은 중국 어선의 조업을 왜 ‘처벌작업’이라고 부르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내용을 보면 제3국 어선들의 조업은 코로나19 전파 위험을 키우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처벌 대상 작업이지만, 정해진 지침대로 행동하면 처벌받지 않는다는 뜻으로 추정된다.
가이드라인도 상세하고 명확하다. ‘처벌’이란 단어는 있지만, 결국 이는 중국 어선들이 처벌을 피할 수 있도록 하는 안전지침 내지는 보호지침인 셈이다.
우리 국민은 ‘행동준칙’ 따라 사살
엄격한 방역 조치야 북한 당국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이처럼 위도와 경도까지 동원해 중국 어선들이 피해 보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을 보니 지난해 9월 22일 발생한 서해 상 해양수산부 공무원 피살 사건이 겹쳐진다. 북한군은 방역을 이유로 무방비 상태로 바다에 떠 있는 사람을 총기로 쏘고, 시신은 불태웠다.
사건 직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정부에 보낸 통지문에서 “우리 군인들은 정장의 결심 밑에 해상경계근무 규정이 승인한 행동준칙에 따라 10여 발의 총탄으로 불법 침입자를 향해 사격하였으며, 이때의 거리는 40~50m였다”고 설명했다.
‘조업권 구매 고객님’인 중국 어선들에 준 것 같은 친절한 가이드라인이 적용될 리 없었다. 박지원 국정원장은 사건 발생 직후인 지난해 9월 25일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북한은 8월 25일 월경이 있을 때 사살하라고 지시했고, 9월 21일 비상방역사령부는 사살뿐 아니라 소각 처리하라는 지시도 이례적으로 했다"고 말했다.
전문가 패널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 해역에서 4~5개월간 조업할 수 있는 허가권은 약 20만~30만 위안(한화 약 3690만~5535만원)이다. 코로나19 사태 전까지만 해도 북한 수역에서 조업하는 중국 어선은 2000척을 넘나들었으니, 작지 않은 수익이다. 결국 방역뿐 아니라 ‘돈이 되고, 안 되고’의 차이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또 다른 점은 북한이 정한 규정을 어겼을 때 받는 처벌의 경중이다. 전문가 패널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어선들은 지침을 어길 경우 선박 압류, 벌금 부과, 추방 등의 벌을 받는다. 우리 국민은 목숨으로 그 대가를 치렀다.
정부가 오매불망하며 기다리던 남북 간 통신연락선이 드디어 복원됐다. 어쩌면 북한에 중국 어선처럼 돈이 되지 않아 더 쉽게 생명을 앗아간 우리 국민 문제는 언제 북측에 제기할지, 많은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