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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코뿔소’는 누가 키웠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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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조민근 기자 중앙일보 경제산업디렉터
조민근 경제산업부디렉터

조민근 경제산업부디렉터

정부 당국자들이 본격적으로 경제 위기론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앞서 ‘부동산 고점론’에서 한 발 더 나간 것이다. 지난달 30일 거시경제금융회의에서 홍남기 경제 부총리는 ‘회색 코뿔소(gray rhino)’ 경계론을 꺼내 들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회자했던 ‘검은 백조’와 달리 코뿔소는 대개 회색이다. 누구나 위험하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눈에 잘 띄기에 오히려 위험을 간과하기 쉽다는 게 맹점이다. 중국의 부동산 재벌 헝다가 350조원의 빚을 끌어안은 채 벼랑 끝으로 내몰리면서 일어난 파장이 전형적이다.

보다 직접적인 경고는 정은보 금융감독원장에게서 나왔다. 우리 경제에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이 닥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폭풍이 다른 기상 상황과 맞물리며 위력이 압도적으로 커지는 현상으로, 실물과 금융이 결합한 ‘초대형 복합위기’를 일컫는다.

눈에 잘 보여 되레 외면하는 위험
경제위기 둘러싼 국내외 경고음
금융·실물 복합위기로 커질 수도
대선 후보들의 공약 현실성 있나

실제로 위기의 파고가 높아지는 징후는 뚜렷하다. 병목현상에서 시작된 공급 쇼크는 잠잠해지기는커녕 전방위로 확산 중이다. 치솟는 에너지·원자재 가격에 ‘세계의 공장’ 중국이 직격탄을 맞고, 급기야 공장 가동까지 중단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인플레이션 상황이 예상보다 길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 미국 국채 금리가 치솟으며 세계 금융시장도 요동치기 시작했다.

낙관론을 펴던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도 한발 물러서는 분위기다. ‘일시적’이라던 인플레이션 압박이 내년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이런 상황이 풀리지 않으면 예상보다 빨리 금리 인상에 나서야 하는 상황에 부닥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내비쳤다. 경기 회복 속도와 부작용을 봐가며 서서히 돈을 거둬들이는 ‘질서 있는 퇴장’을 할 여유가 없는 형국으로 내몰릴 수도 있다는 의미다.

고승범 금융위원장과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정은보 금융감독원장(왼쪽부터)이 지난달 30일 열린 거시경제금융회의에 참석했다. [뉴스1]

고승범 금융위원장과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정은보 금융감독원장(왼쪽부터)이 지난달 30일 열린 거시경제금융회의에 참석했다. [뉴스1]

중앙은행들의 금리인상 도미노도 이미 시작됐다. 먼저 움직인 건 신흥국들이다. 한국을 비롯해 러시아, 헝가리, 체코, 브라질, 멕시코, 칠레 등이 한 차례 이상 금리를 올렸다. 미국이 기침(금리 인상)을 시작하면 행여 독감(자본 유출)에 걸릴까 우려한 탓이다. 이어 지난달 24일 노르웨이를 시작으로 선진국들도 금리 인상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퍼펙트 스톰의 비관적 시나리오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경기를 떠받치던 돈의 홍수가 갑자기 빠지기 시작하면 자산시장의 거품과 거대한 부채 더미가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다. 헝다처럼 손을 드는 ‘대마’들이 속출할 경우 자칫 금융과 실물의 복합위기로 이어질 수도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실러 예일대 교수도 2일(현지시각) 뉴욕타임스에 게재한 경제 전망에서 자산시장 거품의 붕괴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는 “주식, 채권, 부동산 등 주요 자산 가격이 동시에 극단적으로 고평가 된 경우는 역사상 유례가 없다”면서 “10년 이상의 장기간 하락세가 이어질 위험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달 30일 부총리와 한국은행 총재, 금융당국 수장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도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시장과 투자자를 향한 경고 수위도 유례없이 높았다. 하지만 가계부채 관리 방안을 다시 내놓겠다는 것 외에 뚜렷한 대응 방안은 제시하지 못했다. 이미 1800조까지 불어난 가계부채의 증가 속도를 좀 늦춘다고 복합 위기의 파도를 넘어갈 수 있겠냐는 반발이 나오는 이유다.

당국에 대한 불신이 표출되는 이유는 또 있다. 그간 회색 코뿔소를 애써 외면한 대표적인 경제 주체는 다름 아닌 정부였다. 무엇보다 부동산 시장이 들끓는 상황에서 설익은 규제 실험만 지속하며 거품만 한껏 키웠다. 검증되지 않은 경제 정책을 무리하게 밀어붙이다 일자리가 줄고, 한계 자영업자들이 속출하자 재정을 쏟아부어 일시적으로 구멍을 메웠다. 이런 과정에서 저출산·고령화는 심화하고 잠재성장률은 뚝뚝 떨어졌지만 구조적 처방은 지연됐다.

이런 시행착오에도 문재인 정부에선 그나마 초저금리의 유동성 홍수가 있어 그 충격을 흡수하고 은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밀물은 서서히 걷히고 세계 경제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다. 물론 퍼펙트 스톰의 상황까지 치닫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건 ‘좋은 시절’은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내년에 선출될 차기 대통령 역시 전임자의 행운을 누리긴 힘들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유력 대선 후보들의 공약들은 여전히 회색 코뿔소를 못 본 체하는 모양새라는 게 시장의 불안감을 더욱 키우는 요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