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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다의 과학기술 우선 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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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주정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주정완 경제에디터

주정완 경제에디터

세계 3위 경제대국에 새로운 인물이 국정을 총괄하는 자리에 올랐다. 일본의 100번째 총리에 선출된 기시다 후미오(64)다. 지난 4일 출범한 내각 구성을 보면 안정을 중시하면서 조용한 변화를 추진하겠다는 뜻이 보인다. 전임 아베·스가 내각의 각료를 상당수 재임명하면서도 13명의 새로운 얼굴을 뽑았다. 전체 각료 20명 중 절반을 훌쩍 넘는다.

특히 눈에 띄는 새 얼굴은 경제안전보장상이다. 이전에 없던 자리를 새로 만들었다. 이 자리에는 고바야시 다카유키(47) 의원을 발탁했다. 기시다 내각에서 40대 각료는 고바야시를 포함해 두 명뿐이다. 얼핏 생각하면 경제와 안보를 한데 묶는 게 어색한 조합일 수 있다. 여기서 핵심은 반도체다. 기시다 총리가 지난달 자유민주당 총재 경선에서 제시한 정책자료를 보면 반도체를 국가안보 문제로 접근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첨단 반도체의 안정적인 공급을 확보하기 위해 국제 공동개발과 국내 유치 추진 등 경제안전보장을 강화하겠다”고 공약했다.

성장전략 첫줄에 ‘과학기술 입국’
첨단 반도체는 안보 차원서 접근
106조원 ‘대학펀드’ 조성 계획도

기시다 총리는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대놓고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중국 제조 2025’에 따른 ‘반도체 굴기’를 의식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를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국가안보에 필수적인 전략물자로 보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일본도 첨단 기술 경쟁력을 안보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

이런 정책이 갑자기 나온 건 아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지난 6월 ‘반도체·디지털 산업전략’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반도체 분야의 첫 번째 과제로 “첨단 반도체 제조기술의 공동개발과 생산능력의 확보”를 제시했다. 누가 총리를 맡느냐에 상관없이 일본 정부는 반도체 중심의 산업전략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달 8일 자유민주당 총재 경선 과정에서 경제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그는 성장전략의 첫 번째로 ‘과학기술 입국’을 제시했다. [AP=연합뉴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달 8일 자유민주당 총재 경선 과정에서 경제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그는 성장전략의 첫 번째로 ‘과학기술 입국’을 제시했다. [AP=연합뉴스]

기시다 총리는 또 “반도체 등 중요 물자 확보와 기술 유출 방지를 위한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을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이런 정책을 추진할 사령탑으로 선택한 인물이 고바야시 경제안보상이다. 3선 의원인 고바야시는 자민당 안에서 신국제질서창조전략본부라는 기구의 사무국장을 맡아왔다.

첨단 산업기술을 강조하는 기시다 총리의 정책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경제성장 전략의 첫 번째로 ‘과학기술 입국’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올해 안에 10조엔(약 106조원) 규모의 ‘대학펀드’를 설립하겠다고 공약했다. 일본 내각부와 문부과학성에 따르면 대학펀드는 정부 자금 4조5000억엔에 민간 자금 5조5000억엔을 더해 민관 합동기금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대학펀드는 매년 3000억엔가량의 펀드 수익금으로 대학의 기초 연구력 강화, 신진 연구인력 육성, 연구시설 확충 등에 쓴다. 펀드의 운용 기간은 50년으로 설정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대학의 연구개발 능력을 키워가겠다는 의미다. 기시다 총리는 기술 혁신과 연구개발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과감한 세제 개편도 약속했다. 과학기술 전문가를 정부 각 부처에 고문으로 배치하겠다는 구상도 밝혔다.

에너지 정책에선 “원자력 발전 등을 포함한 클린 에너지 전략을 마련하겠다”고 공약했다. 신재생에너지만으로는 탄소배출 감축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게 기시다 총리의 판단이다. 탈원전을 선언한 문재인 정부와는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

기시다 총리에게 성장전략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성장과 분배가 선순환하는 새로운 일본식 자본주의”를 내세운다. 그러면서 “신자유주의로부터의 전환”이라고 설명했다. 신자유주의와는 거리를 두면서 성장과 분배의 균형을 맞추는 데 중점을 두겠다는 의미다. 기시다의 경제정책을 아베노믹스의 단순한 연장으로 볼 수는 없는 이유다.

물론 기시다 총리의 앞길이 장밋빛은 아니다. 당장 이달 말로 예정한 중의원 선거가 발등의 불이다. 만일 이번 선거에서 자민당이 패배하면 기시다 내각은 단명할 수도 있다. 반면 안정적인 과반 의석을 확보한다면 앞으로 정책 추진에 탄력을 받을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 현재까지 각 정당의 유력 대선 주자 중에선 주목할 만한 과학기술 정책을 제시한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후보자들이 아직 준비가 안 된 것인지, 아니면 과학기술에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저출산·고령화로 잠재 성장률이 하락하는 한국 경제에 앞으로 5년은 매우 중요한 고비가 될 것이다. 국가의 미래가 걸린 과학기술 정책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후보자들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