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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중립의 역설…그린플레이션이 세계 경제 발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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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공급망 병목 현상에 따른 인플레이션 공포에 긴장한 세계 금융시장이 또 다른 복병을 만났다. ‘그린플레이션(Greenflation)’이다.

그린플레이션은 친환경을 뜻하는 ‘그린(Green)’과 ‘인플레이션(Inflation·물가상승)’의 합성어다. 친환경 에너지 수요가 늘어나며 구리나 알루미늄 등 원자재 값이 오르고, 화석연료 에너지 생산이 줄면서 에너지 가격도 올라 경제 전반의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인플레이션을 의미한다.

세계 경제와 금융시장은 이미 ‘인플레 발작’ 중이다.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최근 연이어 “공급망 문제가 개선되지 않아 내년에도 예상보다 더 물가 상승이 이어질 것”이라며 “이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에도 나설 수 있다”고 밝히며 주가가 급락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각국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 우려를 드러내는 것은 공급망 병목 현상이 빠르게 회복되지 않아서다. 코로나19로 다국적 기업의 해외 공장 생산 등이 차질을 빚는 데다 인력 이동과 운송 등 물류난이 겹치며 공급발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지고 있다.

태양광 패널 원료 알루미늄 값 급등

급등하는 천연가스 가격.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급등하는 천연가스 가격.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여기에 최근의 원자재 가격 급등은 물가 상승세에 기름을 붓고 있다. 천연가스 가격은 지난 1일(현지시간) 100만 BTU(열량 단위)당 5.62달러로 거래를 마쳤다. 1년 전보다 130.3%나 급등했다. 천연가스 가격의 고공 행진은 탄소중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유럽 탓이 크다. 삼성증권 등에 따르면 유럽 전력 발전의 16%가량을 풍력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올해 충분한 바람이 불지 않으며 전력 공급에 차질이 빚어졌다. 부족한 전력 생산을 위해 유럽 각국이 천연가스 발전소 가동률을 높이면서 천연가스 가격이 치솟은 것이다. 전기 생산에 들어가는 비용이 늘면서 유럽 각국은 전기요금을 인상했다. 난방 수요가 늘어나는 겨울이 다가오면서 천연가스 가격 급등과 그에 따른 전기요금 인상, 뒤따른 물가 상승 도미노 현상에 대한 우려가 더욱 커지고 있다.

전기차·태양광 패널 등에 많이 쓰이는 원료인 알루미늄 가격도 1년 전보다 44%가량 급등했다. 세계 최대 알루미늄 생산국인 중국의 생산 감소 탓이다. 전력난에다 탄소중립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친 영향이다.

중국 전력소비는 급증하는데.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중국 전력소비는 급증하는데.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해 9월 “2060년까지 탄소중립(실질 탄소 배출량을 0으로 줄임)을 실현한다”고 공언한 바 있다. 그런데 알루미늄을 생산하려면 대량의 전기가 필요하고, 석탄 발전으로 전기를 만들면 탄소 배출이 늘어난다. 중국 전력기업인연합회에 따르면 중국 전력 생산에서 화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56.6%에 달한다. 이런 와중에 전체 수입량의 절반을 의지하던 호주로부터의 석탄 수입이 막히자 전력난이 더 악화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1일(현지시간) “중국 전력난이 세계 경제 회복세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고 보도했다.

미국 오클라호마에 본사를 둔 단열 생수병 제조사 심플모던은 최근 중국 저장성 취저우 당국으로부터 중국 현지 공장을 통상보다 2일 줄어든 주 4회만 가동할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사용할 수 있는 전력 규모에도 한도를 둬 실제 공장 가동률은 평소의 3분의 1 정도다.

코로나·전력난 겹쳐 세계 공급망 차질

마이크 베컴 심플모던 최고경영자(CEO)는 WSJ에 “(중국 전력난으로) 내년 봄에는 미국의 소매 상품 가격이 15%까지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루팅(陸挺) 노무라증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중국 전력난으로) 세계시장은 섬유, 기계 부품 등의 공급 부족을 느낄 것”이라며 “이는 미국 등 선진국의 인플레이션을 부추길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 화력발전 원료 석탄 생산규모 제한.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중국 정부, 화력발전 원료 석탄 생산규모 제한.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중국에 있는 애플과 테슬라의 핵심 부품 공장들이 가동을 중단했다는 외신 보도도 나온다. 중국 내 반도체 부품 공장 운영이 중단되면서 반도체 공급 부족 현상이 심화할 거라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지난달 29일 중국 내 주요 발전소 6곳의 석탄 비축량이 15일을 버틸 수 있는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최진영 이베스트투자증권 연구원은 “지난여름부터 냉방기기 등을 중심으로 전력 수요가 급격히 높아졌는데, 중국 정부는 화력 발전에 필요한 석탄 생산 제한 조치를 유지하며 수급 불확실성을 자극했다”고 분석했다.

전력난에 부닥친 중국이 전방위적인 전력원 확보에 나서면서 에너지 가격 급등을 부추기는 악순환도 예상된다. 블룸버그는 중국 에너지 담당 한정(韓正) 부총리가 최근 중국 에너지 기업들과 긴급회의를 갖고 “국가 운영에 충분한 연료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확보할 것을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스웨덴은행 SEB의 비얀실드롭 수석연구원은 블룸버그에 “중국 정부의 명령으로 전력원 확보 경쟁은 더욱 과열될 것”이라며 “에너지 시장의 가격 변동성이 심화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전 세계적인 공급망 차질이 물가 압력을 높이는 상황에서 그린플레이션이 물가 불안을 추가로 자극할 여지가 있다”며 “기업생산 비용 부담 상승과 가계 소비 여력 약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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