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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덕구가 저격한다

이창동 덫에 이창동도 당했다…정치 중독된 문화계의 역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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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왼쪽) 감독과 도종환 시인.

이창동(왼쪽) 감독과 도종환 시인.

이창동에서부터 도종환까지 20년, 문화계는 공적 자금에 중독됐다. 

코로나 19로 제일 큰 타격을 받은 업계 중 하나는 영화산업이다. 관객 수가 급감하면서 영화 개봉이 밀리고 극장은 문을 닫아야 했다. 영화계는 한국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를 비롯한 다양한 정부기관에 영화인을 위한 코로나 지원을 요구하는 풍경을 만들어냈다. 코로나 위기가 지원금 없이는 자생적으로 살아남을 수 없는 문화산업의 한계를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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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발발하기 훨씬 이전에도 한국영화는 지원금에 의존해 왔다. 다양한 지원 사업뿐 아니라 지역 영화제 형식으로 돈을 수혈받지 않으면 대다수 독립영화는 지탱 불가능하다. 뼈아픈 말이지만, 코로나는 위기의 직접적인 요인이라기보다 문화 산업의 후진성을 노출하는 계기에 불과할 수도 있다. 언젠가 터져야 할 일들이 터진 것이다.
예술가에서 문화부 장관에 오른 이창동 감독과 도종환 시인을 언급하는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이창동에서부터 도종환까지 이 20년의 시간을 살펴봐야 지금의 위기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2017년 취임한 도종환 장관의 목표 중 하나는 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 사태 정리였다. 그럼에도 블랙리스트 관련 인사들을 모두 처벌하는 데는 실패해 현장 예술가들 사이에선 볼멘소리들이 튀어나왔다. 왜 실패했을까? 블랙리스트는 비단 지난 정권이 벌인 만행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문화예술계를 중앙 정치에 동원하는, 한국의 문화 행정에 본질적으로 내재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도 장관 재직 시, 국립현대미술관장 선출 당시 불공정한 절차가 논란을 일으키며 화이트 리스트 의혹을 받은 게 이를 잘 보여준다.

스스로 자기 검열하는 문화계 

이처럼 정치적 당파성만으로 문화계와 정부가 맺은 밀월 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 지원금 앞에서는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부지불식간에 무효화하는 탓이다. 정부가 굳이 강권하지 않더라도 예술인들이 자발적으로 정권 입맛을 맞추고 스스로를 검열한다. 때로는 정부가 의도적으로 문화계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원금을 쓴다. 블랙리스트 사태가 이를 증명한다.
노무현 참여정부의 초대 문화부 장관 이창동은 향후 20년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 청사진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지금 문화정책의 기원이 되었다. 박근혜 정권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표절 의혹으로 폐기된 박근혜 정부 당시 ‘크리에이티브 코리아’의 어원은 이창동의 '창의 한국'에 있었다. 처음엔 ‘자율, 참여, 분권’을 중심으로 설계했지만 이러한 슬로건은 정확히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말았다. 문화예술위의 설립부터 시작해 한국콘텐츠진흥원 등 정부 힘은 더욱 강해졌다. 각 부문 예술위가 속속 생기기 시작했다. 자율이라는 명목으로 시민단체가 자리를 차지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확인된 시민사회와 국가의 동맹이 이미 그 당시 문화예술 분야에서 노골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창동은 ‘관’이 ‘예술’에 개입할 때 발생하는 필연적 문제를 충분히 고민하는 대신 각종 지원정책과 위원회 설립을 통해 특정 인맥의 지대 추구를 제도화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노무현 정부에서 문재인 정부에 걸쳐 문화예술계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아울러 국가가 문화예술계를 장악하는 힘은 더욱 커졌다. 독재 정권처럼 노골적으로 예술작품을 검열하는 행위는 없었다. 하지만 지원금과 각종 혜택을 무기로 배제할 대상과 수혜할 대상을 나눴다. 민간 참여를 빙자했지만 정부와 연이 있는 시민단체 인사들을 초빙했다. 불분명한 이유로 지원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생겼다. 문화 예술 분야를 중앙 정치에 종속되게 만드는 데는 진보정권 역시 가담했다.

영화 '암살자들' 포스터. 영진위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예술영화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

영화 '암살자들' 포스터. 영진위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예술영화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

지원 배제된 '암살자들' 

이 시스템을 만든 이창동 역시 결국 그 피해자가 됐다는 건 또 하나의 아이러니다. 2010년 이명박 정부 시절 그가 감독한 영화 '시'는 마스터 영화 제작지원 사업 평가 기준인 70점을 넘지 못해 탈락했다. 제63회 칸 영화제 각본상 수상작에 0점을 준 심사위원이 있었다. 비슷한 일이 이번 정권에서도 일어났다. 영진위는 김정남 암살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암살자들'이 예술영화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평가해, 예술영화 인정 심사에서 떨어뜨렸다. 예술영화 인정에 따르는 각종 혜택을 못 누리는만큼 저예산 독립 영화엔 치명적인 수 있다. '암살자들'은 '시'처럼 불분명한 근거로 지원에서 배제됐다는 이유로 논란이 됐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람과 정치 성향만 바뀐 채 이런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오른쪽)은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쾌거 이후 봉준호 감독 등 제작진과 출연진을 청와대로 불러 오찬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오른쪽)은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쾌거 이후 봉준호 감독 등 제작진과 출연진을 청와대로 불러 오찬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한국 영화의 쾌거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한국 영화 산업이 마주한 장애물을 눈가림했다. 프리 프로덕션에서 개봉까지 1년 넘게 걸리는 영화 제작은 평균 제작비가 50억원을 넘는 고비용 저효율 사업이다. 개봉 영화가 손익분기점을 넘길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상황이 이러니 영화인들은 영진위 같은 국가 기관에 의존하고 싶어 한다. 영진위 예산은 2018년 659억 원에서 2년 만에 1015억원으로 400억원 가까이 늘었다. 영진위는 예산의 많은 부분이 ‘수직 계열화’로 무장한 대기업 독점에 대응하고, 영화 시장 바깥에 있는 독립 영화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 설명한다. 실제로 대기업 영화를 제외하면 국가 지원 없이 존속할 수 없는 수준이 됐다. 독립 영화라는 명칭과 상반되게 이미 국가에 의존하고 있다. 영진위 없이 영화계도 생존할 수 없다.
정부는 지원금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문화계에 어떤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을까? 잠시 지방소멸을 상기해보자. 2040년 즈음엔 지방 사립대가 문을 닫고, 예체능 교육을 담당할 수 있는 학교가 몇 안 남을 것이다. 문화계에 투입될 인력과 문화를 소비할 수 있는 관객이 점점 사라지고 만다. 정부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뾰족한 수를 내지 못한다.
자생력을 키워줘야 하지만 오히려 지원이 없으면 폭삭 주저앉을 예술계를 위해 지원을 늘려 연명시키고 있다. 영화제는 우후죽순 늘어나 200여 개에 이르지만 제대로 된 영화제는 소수에 불과하다. 관객을 위한 영화제가 아니라 영화인들에게 심사위원 등 각종 일자리를 공급하는 용도라 그렇다. 만약 지방소멸로 이런 영화제들이 사라진다면 독립 영화인들에겐 가히 치명적이다. 예술가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라는 얘기는 지나간 옛 시절의 풍문이 됐다.

미래 세대 문제 눈 가린 '기생충'

'기생충'의 영광을 이끌었던 CJ조차 영화관 사업을 대폭 축소하고 있다. 문화계에 인력과 자본이 빠져나가고 있으니 미래 세대는 난감할 뿐이다. 물러난 자본의 빈자리를 공적 자금이 채우고 있지만 독이 든 성배에 가깝다. 공적 자금은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마르는 바닷물이나 마찬가지다. 공적 자금에 중독된 탓에 자립을 포기하고 있다. 문화예술계가 스스로 자생할 수 없는 수준으로까지 퇴행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한다면 청년 예술가들은 처음부터 생존하려고 국가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중앙 정치의 성향을 살피는 눈치 보기는 더 심해질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적폐 청산이 이번 정권의 과업이라면, 좋다. 적폐를 청산하자. 하지만 문화예술 시스템이 중앙정치에 종속되는 한 블랙리스트는 특정한 정권에서만 일어나는 변수가 아니라 어느 정권에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상수다. 지금 문화계에, 특히 이제 막 여기 발 디딘 청년들에게 필요한 건 공적 자금이 아니라 자립이다. 당파성 그 자체보다 국가에 예속된 예술계가 문제다. 예술을 중앙 정치에서 독립시킬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문화행정가 경력이 있는 이창동·도종환 두 선배 예술인도 미래 세대를 위해 이 길에 동참해주길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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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위는 추후 재심사를 거쳐 '암살자들'을 예술영화로 인정했다고 알려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