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소문 포럼

캐스퍼의 놀라운 반전

중앙일보

입력 2021.09.24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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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온라인 사전예약 첫날 서버 다운되더니…

첫날 서버가 다운될 정도로 사전예약 주문이 몰린 현대차의 경형 SUV 캐스퍼. 사진 현대차

첫날 서버가 다운될 정도로 사전예약 주문이 몰린 현대차의 경형 SUV 캐스퍼. 사진 현대차

이 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새로 나온 경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캐스퍼의 인기가 돌풍 수준이다. 온라인으로만 파는데, 사전예약 첫날에만 서버가 다운될 정도로 클릭이 몰려 1만8940대가 팔려 내연기관차 중 최다 기록을 썼다. 추석 연휴에도 2만대에 육박하는 주문이 몰렸다. 23일 기준 사전예약 대수 3만대를 훌쩍 넘어섰다.

정치적 산물로 악전고투끝 탄생
완성차 노조와 시장에 강한 자극
전문가 걱정 뚫고 3만대 사전예약
소비자 찾는 제품 내야 지속 가능

캐스퍼는 단순한 차가 아니다. 문재인 정부 ‘OO형 일자리’ 의 대표 아이콘이다.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이 문 대통령의 캐스퍼 온라인 사전예약 사실을 전하며 “광주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8개 지역에서 상생 협약이 맺어졌다”며 “앞으로 51조원의 투자와 직간접 일자리 13만개를 만들어낼 것으로 기대된다”고 자화자찬하기도 했다. 임기 말인 현 정부 입장에선 규제 완화나 새로운 기업 육성 정책을 새로 만들어 내긴 힘들다. 그러니 그나마 임기 중 심혈을 기울였던 OO형 일자리의 안착을 보여주는 캐스퍼가 실로 고마운 존재일 것이다.

우여곡절 많았던 광주형 일자리

캐스퍼는 현대자동차의 위탁을 받아 광주 빛 그린 산업단지 내 공장에서 광주글로벌모터스(GGM)가 만든다. GGM 광주 공장은 국내에 23년 만에 처음으로 생긴 완성차 공장이다. 지역 사회의 일자리 부족을 해결하고, 동시에 완성차 업계의 고임금 저생산성 구조도 탈피해 보자는 취지였지만, 탄생 자체는 완전한 정치적 산물이었다. 광주광역시가 483억원(21%), 현대차그룹이 437억원(19%), 광주은행이 260억원(11%) 등을 출자해 설립했다. 정부가 ‘손목을 비틀자’ 현대차는 거의 억지로 GGM에 참여했다. 그러면서도 경영권은 끝까지 거부했다.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주거ㆍ복지ㆍ보육시설 지원 등을 통해 보전한다. 하지만 노사민정 협상이 난항을 겪으며 회사 설립 과정은 실로 울퉁불퉁했다. 박수현 국민소통수석이 최근 SNS에 밝힌 것처럼 문 대통령 참석이 예정됐던 협약식이 2018년 12월 협상 실패로 하루 전날 취소되기도 했다.

지난 15일 오전 광주 광산구 빛그린산업단지 광주글로벌모터스(GGM)에서 열린 '광주형 일자리' 양산 1호차 생산 기념행사에서 이용섭 광주시장 등 내빈들이 경형SUV '캐스퍼'에 사인하고 있다. 뉴스1

지난 15일 오전 광주 광산구 빛그린산업단지 광주글로벌모터스(GGM)에서 열린 '광주형 일자리' 양산 1호차 생산 기념행사에서 이용섭 광주시장 등 내빈들이 경형SUV '캐스퍼'에 사인하고 있다. 뉴스1

전문가도 경형 SUV 생산 방침에 갸우뚱 

경형 SUV라는 그간 시장에 없던 '희한한’ 신차 모델도 타협의 산물이었다. 강한 노조가 버티고 있는 현대차와 기아가 생산하지 않는 차종을 만들어 팔아야 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조차 대형 SUV만 인기인 한국 시장에서 경형 SUV가 팔릴 수 있겠냐며 고개를 갸웃했다.
결과적으로 운이 좋았고, 차가 좋았다. 현대ㆍ기아차 판매장 어디에도 전시돼 있지 않은 캐스퍼지만, 소비자는 3차원 가상현실인 메타버스 플랫폼에서만 차를 체험해보고도 기꺼이 온라인으로만 파는 차의 사전 예약에 나섰다. 요즘 차박 열풍에 맞게 운전석까지 완전히 젖혀지는 데다가, 경차론 유일하게 지능형 안전기술을 장착했다. 여기에 귀여운 디자인으로 소비자가 선호하는 차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다.

캐스퍼는 최근의 차박 열풍을 의식해 운전석까지 완전히 접히게 내부를 설계했다. 사진 현대차

캐스퍼는 최근의 차박 열풍을 의식해 운전석까지 완전히 접히게 내부를 설계했다. 사진 현대차

3만대를 훌쩍 넘는 사전 예약 물량은 고무적이다. 올해 생산 예정된 1만2000대를 넘어서, 내년 생산할 물량 5만대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GGM은 앞으로 연간 7만대를 생산하고 ‘글로벌모터스’라는 이름에 걸맞게 수출까지 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걱정도 적지 않다. 전기차 시대에 기름 많이 먹는 경형 SUV가 얼마나 오랫동안 소비자에게 인기를 끌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또 캐스퍼 위탁 생산이 끝나는 5년쯤 후에 GGM이 어떤 차를 만들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캐스퍼의 성공으로, 현대차 노조가 전기차 같은 주력 차종을 GGM이 만들 수 있게 합의해 줄 가능성은 한층 줄었다.

살아남아 차 산업 '메기' 되기를

GGM이 캐스퍼 이후에도 지속 가능할지 여부는 한국 노동시장과 자동차 산업에 매우 중요하다. GGM 직원 연봉은 주 44시간 근무에 평균 3500만원 초임으로 현대차ㆍ기아의 절반 수준이다. 하지만 경력직 모집에 최고 21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을 정도로 지역 경제 입장에선 소중한 존재다. 차량 개발과 판매를 맡은 현대차에도 GGM은 노조의 반대로 그간 해보지 못한 여러 새로운 시도를 해 볼 수 있는 ‘메기’다. GGM이 계속 성장해 노동 시장과 차 시장에 변화를 불러오는 메기로 끝까지 잘 살아남길 바란다.
캐스퍼가 던지는 메시지는 또 있다. 시장의 호응을 얻는 제품을 계속 생산하지 못한다면, 정치적으로 억지로 만들어 낸 일자리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다른 ○○형 일자리도 명심해야 할 점이다.

최지영 경제에디터

최지영 경제에디터

Innovation L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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