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소문 포럼

희생번트 대선

중앙일보

입력 2021.09.28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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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차세현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차세현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차세현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야구엔 희생번트라는 이타적인 플레이가 있다. 주자를 진루시키기 위해 페어 지역으로 느리게 공을 굴리는 타격방법이다. ‘희생(sacrifice bunt)’이라는 말이 의미하듯 타자가 1루에 살아갈 확률은 매우 낮다. 그러나 희생번트에 성공하고 더그아웃에 돌아온 타자는 홈런타자 못지않은 환영을 받는다. 배트를 맘껏 휘둘러 홈런을 치고 싶지 않은 타자가 있겠느냐만 그런 욕심을 억누르고 팀 승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기 때문이다.

대선이 채 6개월도 안 남았다. 각 당 경선이 한창이다. 여당의 승리는 정권 재창출이고, 야당의 승리는 정권 교체다. 현재 여당은 4명, 야당은 국민의힘만 놓고 보면 8명의 후보가 타석에 들어서 경선 승리와 대통령 당선이라는 연타석 홈런을 노리고 있다. 하지만 요즘 국민의 눈에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이승엽이나 이대호 같은 국민타자는 보이지 않는다.

호감 가는 후보 없는 이번 대선
정치 양극화로 진영 대결 격화
국민 감동 주는 희생번트 정당
난전 속 대선 승리 가능성 높아

한국갤럽이 지난 14~16일 조사한 대선주자 호감도 조사 결과를 보면, 더불어민주당 소속 이재명 경기지사와 이낙연 전 대표, 국민의힘 소속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홍준표 의원 등 여야 상위권 후보 4명이 모두 ‘호감’보다 ‘비호감’ 답변 비율이 월등히 높았다.

호감 34%, 비호감 58%인 이 지사가 그나마 비호감도가 낮은 편이다. 윤 전 총장(30% vs 60%), 홍 의원(28% vs 64%), 이 전 대표(24% vs 66%)는 비호감 비율이 호감 비율의 두 배 이상이었다. 특히, 갤럽에 따르면 올해 들어 ‘정권 교체론’이 ‘정권 유지론’보다 최소 6%포인트(2월), 최대 21%포인트(4월 재보선 직후) 높은데도 야당 주요 후보의 호감도는 이 지사를 앞서지 못하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 손아섭. [연합뉴스]

롯데 자이언츠 손아섭. [연합뉴스]

상황이 이렇다면 이번 대선에선 ‘당은 싫지만 사람이 좋아 뽑겠다’는 말이 사라질 것 같다. 문재인정부 기간 깊어진 정치 양극화와 극단화를 감안하면 이래저래 2012년 대선 이상의 진영 대결이 될 것이란 얘기다. 내년 대선이 팀 대결이라면 희생번트의 의미는 더욱 소중해진다. 희생번트를 적절하게 대 점수를 차곡차곡 쌓은 팀의 승리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 레이스에서 국민의힘에선 두 명이 희생번트를 댔다. 둘 다 정치신인이다. 대선 주자였던 윤희숙 전 의원은 의원직을 사퇴했다. 정권 교체의 최대 명분인 문재인정부의 부동산 실패와 내로남불 행태가 부모님의 부동산 관련 불법 의혹으로 허물어져선 안 된다는 이유였다. 최근 이재명 후보가 수천억 원의 막대한 개발이익을 민간업자에게 준 대장동 개발 의혹으로 곤욕을 치르는 걸 보면 윤 전 의원의 희생번트는 적확했다.

또 한 번의 희생번트는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댔다. 최 전 원장은 윤 전 총장이 ‘고발 사주’ 의혹으로 휘청일 때 먼저 손을 내밀었다. 국민의힘 2차 컷오프 통과마저 장담하기 힘든 상황인데도 말이다. 그는 경쟁 후보의 곤경을 활용하지 않았다. 대신 정권의 대선 개입 농단을 분쇄하고 국민의 열망인 정권교체를 위해 함께 최선을 다하겠다고 선언했다.

민주당에선 희생번트가 아닌 기습번트가 있었다. 이낙연 전 대표의 의원직 사퇴다. 호남 경선을 앞둔 이 전 대표의 사퇴는 배수진을 친다는 결기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수비 허점을 파고들어 1루에 진루하기 위해 대는 기습번트였다. 대신 정부·여당은 국민 88% 4차 재난지원금 지급, 대체 휴일제 확대 등 경기 내용과 상관없는 각종 팬서비스를 쏟아내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 외야수 손아섭 선수는 지난 8월 역대 최연소, 최소경기 2000안타 기록을 달성했다. 그는 리그 최다안타 기록에 도전하는 베테랑 안타 기계다. 그러다 보니 통산 희생번트는 14시즌 동안 22차례뿐이었다. 그런 손아섭이 8월 23일 KT 위즈와의 경기에서 21번째와 22번째 희생번트를 연속으로 성공해 화제가 됐다.

래리 서튼 감독은 “사인도 주지 않았는데 뒷 타자들의 타격감이 좋아 공격 기회를 연결한 것”이라며 “정말 자랑스럽다”라고 말했다. 이날 자이언츠는 리그 1위 팀에 승리했다. 가장 안타를 많이 친 베테랑의 희생번트를 지켜본 다른 선수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경선 레이스가 후반으로 치닫고 있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혼전에, 난전이다. 내외부의 경쟁자와 다퉈야 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황이다. 하지만 한 가지 짚어보려 한다. 역대 최고 수준의 비호감이 넘쳐나는 이 정치판에서 희생번트를 많이 대는 팀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희생은 감동의 다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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